만화리뷰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파사드 (FACADE)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만화는 많지만, 우도 시노하라의 만큼 매 권을 볼 때마다 몇 번이건 지치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는 참 영리하고 효과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한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신파와 감동을 동시에 선사하며 에피소드가 품고 있는 감정을 풀어 가...

2013-12-09 원은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만화는 많지만, 우도 시노하라의 <파사드> 만큼 매 권을 볼 때마다 몇 번이건 지치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파사드>는 참 영리하고 효과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한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신파와 감동을 동시에 선사하며 에피소드가 품고 있는 감정을 풀어 가는데 그것이 결코 싸구려가 아니다. 그러니 에피소드의 감정과 주인공의 상황을 엮어서 받아들이다 보면 푹 빠져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만큼 <파사드>에는 슬픈 이야기가 많다. 감동적인 이야기도 많고 가슴 아픈 이야기도 많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도 식상하지 않다. 아주 특별한 재능을 지닌 주인공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감동을 풀어내는 만큼 이야기도 참 여러 가지 맛과 느낌이 난다. <파사드>의 경쟁력은 거기에 있다. 탁월한 상상력과 특이한 소재, 공간감을 활용한 감동의 극대화 <파사드>는 한 몸속에서 살고있는 다섯 생명체가 겪는 다양한 이야기를 옴니버스식으로 풀어낸 만화다. 주인공 파사드는 잘생긴 젊은 남자. 그에게는 아주 특별한 비밀이 있다. 바로 그의 몸속에 자신 이외에 다른 존재가 살고 있다는 사실. 그것도 무려 넷이다. 파사드는 네 개의 각각 다른 존재와 몸을 나누어 쓰고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네 개의 각각 다른 존재가 파사드의 속에 담겨 있다. 그들은 파사드의 몸속에서 동반자로 살다가 필요한 순간 밖으로 튀어나온다. 단순한 다중인격이 아니라 그는 몸속에 다른 존재를 담아두고 사는 일종의 그릇이다. 파사드의 몸속에는 파사드 외에, ‘울프 페이스’라 불리는 늑대, ‘트윈’이라는 쌍날개의 백조, ‘교수’라고 하는 정체불명의 정신체와 ‘용’ 비슷한 존재인 ‘너크’, 이렇게 넷이 각각 살고 있다. 파사드는 이들을 대표하는 얼굴로서 이들 중 유일한 인간이자 담겨 있을 육체의 제공자다. 한 몸을 공유하며 살아가지만, 그들이 늘 파사드의 모습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 자신의 모습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때로는 백조 트윈과 파사드가 합쳐져 백조 처녀로 불리기도 하고 때로는 파사드의 몸에 울프 페이스의 얼굴이 합쳐지면서 고대 이집트에서 신의 사자 아누비스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들은 이유도 모르는 체 숙명이 이끄는 대로 여기저기, 시간과 공간, 차원을 넘나들며 각종 사건, 사연에 휩쓸린다. 그리고 그 안에서 현실을 건드릴 수 없되 때로는 방관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사건의 또 다른 주인공이 된 채로 그 흐름을 지켜본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배경은 1999년 이후의 일본으로, 세계 전쟁의 발발 이후 황폐해진 지구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아이들의 리더는 도키오라는 소년. 그는 쌍둥이 여동생과 다른 아이들을 돌보며 살고 있다. 황폐해진 도시에서 사는 이 아이들에게 최대의 적은 바로 어른들. 무장한 어른들은 아이들이 숨겨둔 식량을 빼앗기 위해서 호시탐탐 아이들을 노리고 그들에게 잡혀 위험에 처한 도키오를 파사드가 구해주면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난다. 이 우연한 만남은 도키오의 인생을 바꿔놓는 계기가 된다. 어른을 믿지 못하는 소년 도키오는 파사드에게 마음을 열고 그를 의지하게 된다. 그는 파사드의 몸속에 살고 있는 울프페이스의 존재를 알고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파사드에게 더욱 천진하게 마음을 주게 되는데, 파사드 또한 도키오와 그가 돌보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만나면서 그들에게 연민과 애정을 느낀다. 어른들의 습격을 피해 도망치던 도키오는 새가 날아가는 방향을 따라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날 것을 결심하고 파사드는 그들과 함께한다. 자신들이 가는 곳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채로 하염없이 걷던 어느 날 파사드는 끝없이 이어진 황무지를 보며 아이들에게 바위 아래서 기다리라 시키고 백조 트윈의 날개로 황무지 끝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한다. 며칠을 날아간 끝에 파사드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일행을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도키오 일행에게 돌아가려 하는데 그 순간 예기치 않았던 이동이 시작된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도키오를 생각하며 절규하는 파사드. 그런 그가 새로 도착한 곳은 몇 년의 시간이 흐른 같은 장소. 그곳에서 파사드는 엄마가 되어있는 꼬마 미호를 만나게 되고. 그때부터 몇 번의 시간을 앞뒤로 거슬러가며 이 아이들의 미래와 조우하게 된다. 시간과 장소, 차원을 넘나드는. 한동안 타임슬립 물이 유행 했는데 <파사드>도 일부는 타임슬립물 이다. 그런데 이 만화는 단순히 시간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 차원 모든 것을 이동한다. 어느 곳으로 가든 거칠 것이 없고 어디든 그를 막을 수 있는 곳은 없다. 다만 안타까운 점이라면 자신의 의지대로 이동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파사드는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옮겨지고 이동된다. 그래서 그에게는 가슴 아픈 일도 종종 생긴다.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섣불리 할 수도 없다. 그는 언제나 방관자여야만 한다. 시간, 공간, 차원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는 설정은 유명한 영국 SF 드라마 <닥터 후>와 일견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드라마 속 닥터는 타디스라는 ‘안이 바깥보다 넓은’ 일종의 시공초월타임머신을 타고서 시공은 물론, 지구, 우주, 차원까지 넘나들며 다양한 사건 사고에 휘말리고 해결한다. 안이 바깥보다 넓다는 설정 자체가 한 몸에 다섯 개의 다른 존재가 살고있는 파사드와 묘하게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또한, 평범한 인간이 아니며 시간에 구속되지 않고 때에 따라 다른 모습이 되기도 하는 ‘파사드’ 캐릭터의 특징은 닥터가 인간이 아닌 우주인, 그것도 시간을 다스리는 타임로드 종족이라는 점이나 재생성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점과 비슷하다.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미리 말해두는데 소재나 설정의 닮은 점을 말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큰 차이점은 정해진 우주의 규칙이나 역사를 바꿀 수는 없지만, 비틀리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 직접 사건에 뛰어들어 해결하는 닥터와 달리 파사드 혹은 그의 몸속에서 사는 다른 존재들은 직접 사건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켜보는 게 전부이다. 지켜보고 때로는 상대에게 희망과 사랑을 준다. 그들은 슈퍼 영웅도, 시간을 조종하는 타임로드도 아니다. 늑대이고 백조이고 정신체이고 인간이고 용이다. 게다가 그들은 스스로 이동을 결정할 능력도 없다. 흘러가는 운명은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다. 흐름의 방향을 트는 것은 파사드처럼 잠시 스쳐 가는 이방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그 자리에 있었고, 주인공의 곁에 있으므로 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듯한 운명의 아주 미세한 틈은 분명히 변화한다. 소년 도키오는 파사드를 만남으로써 늘 두근거리며 하늘을 보고 누군가를 기쁘게 기다리는 행복을 알게 됐다. 파사드를 만나기 이전까지 도키오에게 하늘을 보는 습관은 불안을 잊기 위한 것이었지만, 파사드를 만난 후의 도키오에게 하늘을 보는 것은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는 일종의 행복과 희망이었다. 아내를 잃은 바이킹 전사 에이반에게 그의 수호 백조로 불리던 백조 처녀는 전사로서, 남자로서 에이반의 인생을 풍족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또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버려진 왕자 메네스와 시중드는 꼬마 키리를 지켜주던 늑대 머리 신 ‘아누비스’는 그들에게 죽음 대신 삶을 찾아준다. 파사드는 단순히 이야기의 관찰자를 넘어서 그들과 감정적인 교감을 이루며 이야기 속에 효과적으로 스며들어 감동을 극대화한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춥고 긴 겨울밤, 가슴이 시큰해질 이야기의 감동을 만나고 싶다면 <파사드>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