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가의 기적
“난 그냥 죽은 내 아내가 환생한 것처럼 옛날 그 모습 그대로를 만든 것뿐일세. 난 이걸로 만족하네. 이건 기술도, 학문도 아무 것도 아닐세.”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초기작(또는 데뷔작)을 본다는 건, 남에게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설렘이 있기 마련이다. 그 작가...
2013-03-20
김진수
“난 그냥 죽은 내 아내가 환생한 것처럼 옛날 그 모습 그대로를 만든 것뿐일세. 난 이걸로 만족하네. 이건 기술도, 학문도 아무 것도 아닐세.”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초기작(또는 데뷔작)을 본다는 건, 남에게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설렘이 있기 마련이다. 그 작가의 어떤 점이 자신을 끌어당겼는지부터, 그 작가의 작품은 이런저런 부분이 훌륭하다고, 남에게 설명해야하는 것만큼 귀찮고 까다로운 일은 없기 때문에,(사실 팬클럽 문화의 본질은 이런 정서들을 서로 공유하는 것에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지만) 이 작품에 대해서 장황하게 얘기하기 보다는, 이 작품을 그린 작가에 대해 간략한 소개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이 글을 보고 이 작가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기는 독자가 한 명이라도 생긴다면, 그 독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 작가의 최근 작품들을 거쳐 결국은 이 작품까지 자연스럽게 도달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지면을 빌어 소개하는 작품은 니시 케이코의 1993년 作 “3번가의 기적”이다. “만약에...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는다고 한다면...당신은 요리를 못 하시니...가능하다면 내 요리와 똑같은 맛을 낼 수 있는 인조인간을 만드시겠죠. 그렇게 된다면 나와 꼭 닮은 인조인간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학자들에게 날 구경거리로 만들 건가요? 그때도 과연 과학이라 말할 수 있겠어요?” 1966년생인 니시 케이코는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로 명성을 쌓은 일본의 아티스트다. 여기에 소개하는 “3번가의 기적”이란 작품 외에도 “STAY”, “히라히라 고교 궁도부” 등의 ‘청춘물’, “남자의 일생”, “언니의 결혼” 등의 ‘성인 로맨스물’ 등이 한국어판으로 소개되었다. 내가 이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이 “남자의 일생”(전 3권)이었는데, ‘사랑을 바라보는 작가의 독특한 시각’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서 다른 작품도 찾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작품의 전반적인 스타일이 굉장히 깔끔하고 유려하며, 뛰어난 그림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야기 속의 캐릭터에 집중하게 만드는 기술’이 아주 탁월하다. 연출방식도 전반적으로 ‘심플’한데, 장면 안에서 ‘여백의 미’를 창출해 여유롭고 느긋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든다. 인생의 관록이 느껴지는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도 무척 좋다. ‘어른들의 러브스토리’를 다룬 “남자의 일생”이나 “언니의 결혼” 같은 작품 외에도, 고등학교를 무대로 한 “STAY”나 “히라히라 고교 궁도부” 같은 ‘청춘 러브스토리’를 보면, 이 작가가 옴니버스 식 구성에 매우 능하고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출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3번가의 기적”은, ‘1993년 作’으로, 니시 케이코의 데뷔작인 것 같다. ‘하기와라 포목점’이라는 메이지 시대의 ‘양장점’을 무대로, ‘대주인’이라 불리는 30대의 외모를 가진 ‘신비한 노인’을 중심으로 여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해, 일정한 스토리 없이 인물별로 그때그때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초기작이라 그런지, 그림도 연출도 스토리도 매우 거칠고 미숙해 보기가 힘들지만, 전체 15권중에서 마지막 부분(특히 가족사의 비밀이 밝혀지는 12~14권의 ‘살무사’편)으로 가면 니시 케이코의 매력이 제대로 발휘되기 시작한다. 모든 이에게는 ‘시작’이 있고, “3번가의 기적”은 니시 케이코의 ‘시작’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