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알고 있듯이 지금부터 107년 전, 우리 이외의 인류는...모두, 거인에게 잡아먹혔다. 그 뒤 우리의 조상은 거인이 넘지 못하는 견고한 ‘벽’을 쌓음으로써, 거인이 존재하지 않는 안전한 영역을 확보하는 것에 성공했지만...그것도 5년 전까지의 얘기...너희 중에는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5년 전, 참극은 다시 일어났다.” 이 작품을 본 어떤 네티즌이 이런 평을 써놓았다. “이런 대작과 동시대에 살 수 있다니!”, 음...이 의견에 동의한다. 나름 만화 애호가로서 40여년 가까이 살면서 수많은 명작, 화제작들을 읽어왔지만, 아주 가끔, 동시대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를 관통하는 명작들이 등장하곤 한다. 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겐 “드래곤볼”이 그랬고, “북두신권”이 그랬으며, “시티헌터”가 그랬다. 고등학교 때는 “슬램덩크”랑 “로꾸데나시 블루스”도 있었다. 조금 나이 먹어서 본 “멋진 남자 김태랑”도 좋았다. 우리나라 만화로는 “공포의 외인구단”이나 “지옥의 링”, “남벌” 같은 이현세 작품도 너무 좋았고 “오! 한강”, “미스터Q”, “무당거미”, “담배 한 개비”, “카멜레온의 시”, “고독한 기타맨” 같은 허영만 작품도 정말 좋았다. 김수정의 “아기공룔 둘리”도 빼놓을 수 없겠다. 어른이 된 뒤에야 보게 된 이두호의 “임꺽정”과 “덩더꿍”,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과 “내파란 세이버”, 고우영의 “삼국지”도 인생에 남을만한 좋은 작품이었다. 이런 ‘시대를 관통하는 명작’들은 만나기가 정말 쉽지 않은데, 일본 같은 ‘세계 최강의 만화대국’에서도 이런 작품들이 출현하는 경우는 결코 흔치않다. 하지만 여기에 소개하는 이 작품은, 정말 오랜만에 나온, “시대를 관통하는 명작”의 범주에 포함시킬 만한 작품이다. “100년간 평화를 누린 대신 우리는 엄청난 참극을 대가로 치렀다. 당시의 위기의식으로는 갑자기 나타난 ‘초대형거인’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 결과...가장 바깥에 있는 벽 ‘월 마리아’를 포기, 인류의 활동영역은 현재 우리가 있는 ‘월 로제’까지 후퇴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초대형거인’이, 벽을 파괴하러 온다 해도 이상할 것 없다. 그때 제군은 본분에 따라 ‘생산자’를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쳐 거인이라는 위협에 맞서야 한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각설하고, 이 리뷰를 통해 소개하고자 하는 작품은, 고단샤의 월간 만화잡지 “별책 소년매거진”에 2009년 10월 호부터 현재까지 인기리에 연재중인, 이사야마 하지메가 그린 “진격의 거인”이다. 이 만화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사람을 먹어치우는, 인간의 형상을 한 거인(巨人)들이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하고, 인류는 거인에 맞설만한 마땅한 대응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순식간에 전멸의 위기에 몰린다.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는 50미터 높이의 거대한 벽을 쌓고 그 안으로 도피해 10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게 되고, 긴 시간이 지나간 탓인지 인류는 벽 안에서 안주하며 다시금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살아가고 있었다. 거인에 대한 위기의식도 옅어져서 가끔 벽 바깥으로 ‘조사병단’이라 이름 붙은 군인들이 탐사를 하러 나가지만, 별다른 소득도 없이 거인들의 제물만 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50미터 높이의 벽보다 더 큰 ‘초대형 거인’이 나타나 벽을 부숴버리고 부서진 틈 사이로 거인들이 난입해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 인간들의 세상은 거인들의 발아래 허무하게 무너지고, 안쪽에 세워진 또 다른 벽, ‘월 로제’안으로 생존자들은 황급히 피난해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5년이 흘렀다.」 ‘인류를 잡아먹는 거인(巨人)의 습격’이라니, 이토록 ‘급진적이고 스펙터클한 상상력’을 요즘엔 통 보질 못했다. 한 작품이 히트하면 그 작품을 따라한 수많은 아류작들만 양산되는 요즘의 만화출판계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더 놀라운 사실은, 작가인 이사야마 하지메는 이 작품이 ‘데뷔작’이라고 한다. 이건 단순한 ‘대박’을 넘어선, 그야말로 ‘천재의 출현’이다. “거인을 무찌르는 방법은 하나, 여기를 노리는 거다! 후두부 아래에서 목덜미에 걸친 이 부분, 거인은 여기가 크게 손상되면 재생되지 못하고 죽어.” 현재(2013.01) 한국어판으로는 8권까지 출간된 “진격의 거인”은, ‘거인이 등장하는 스펙터클한 판타지’로 소개를 끝낼만한, 그런 단순한 작품이 아니다. 이 작품이 최고의 평가를 받는 첫 번째 이유는 주인공인 엘런과 미카사, 아르민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탁월하다는 점에 있다. 벽 안에서 조용히 살아가자고 주장하는 보수파와 벽 바깥으로 나가 거인과 싸워 이기자고 주장하는 혁신파의 대립, 최악의 상황에서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본성을 드러내는 인간내면의 묘사, 절대적인 공포 앞에서 힘없이 절망하고 마는 인간의 나약함,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라도 누군가를 지키려는 인간의 희생정신과 사명감 등등 얽히고설킨 인물들 간의 복잡한 관계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심리묘사와 갈등구조가 정말 탁월하다. 이 작품이 최고의 평가를 받는 두 번째 이유는 판타지를 ‘현실처럼’ 만들어버리는 작가의 세밀한 설정과 연출에 있다. 매 화가 끝날 때마다 작가는 마지막 페이지에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설정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거인이 등장하는 세계에 대한 세심하고 구체적인 세계관, 인류가 벽을 쌓고 지키는 방법, 사람들의 신분에 따라 살고 있는 위치가 다른 ‘벽’과 ‘도시’의 지도, 거인과의 전투에서 거인을 죽이는 방법, ‘입체기동’ 장비와 훈련법, 이제껏 밝혀진 거인의 비밀 등등,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드는 ‘설정의 설득력’을 이미 갖추고 있다. 또한 거인과 인류가 대결하는 전투장면이나 거인과 거인이 대결하는 전투장면 같은 경우, 보는 이에게 엄청난 박진감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런 스펙터클한 연출을 보게 되면, 왜 이 만화를 사람들이 ‘대작’이라고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액션영화와 SF영화가 절묘하게 혼합된 느낌의 판타지’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주인공인 앨런이 거인으로 변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전반부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또 다른 이야기’로 나아가고 있는데, 스토리의 축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와 감동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정말 오랜만에 출현한, ‘다른 작품과 비교가 불가능한 명작’임에 분명하다. 만화를 읽다보면 문득, 주인공들을 포함한 ‘벽 안의 인류’가 마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다’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힘과 공포에 짓눌려,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살고 있는 무기력한 시민들의 모습부터, 어떻게든 좀 더 나은 쪽으로 세상을 바꿔보려는 혁명가들의 모습, 자신의 안위를 위해 모두를 희생시키는 탐욕스러운 정치가들의 모습 등등 다양한 인간군상의 면면을 작품 속에서 다양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못 본 분들이 계시다면 ‘강력하게 추천’한다.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다. ‘대작’과 동시대를 사는 행복감을 느껴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