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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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산보

“당신, 에디슨 전구라고 들어본 적 있어? 에디슨이 처음 만들었다는 전구의 복제품이래. 이건 1879년의 불빛이라고....1500엔이나 했지만.” (-본문 17p중에서) 쿠스미 마사유키(글)와 타니구치 지로(그림)가 만나 탄생한, 정갈하고 단단한 느낌의 명작 만화...

2013-03-15 김현우
“당신, 에디슨 전구라고 들어본 적 있어? 에디슨이 처음 만들었다는 전구의 복제품이래. 이건 1879년의 불빛이라고....1500엔이나 했지만.” (-본문 17p중에서) 쿠스미 마사유키(글)와 타니구치 지로(그림)가 만나 탄생한, 정갈하고 단단한 느낌의 명작 만화, “우연한 산보”가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이 둘이 공동으로 작업한 또 다른 작품으로는 “고독한 미식가”라는 ‘독특한 음식 기행 만화’가 2010년에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역시 난 산책의 천재야. TV나 잡지에 나온 곳을 찾아가는 산책은 산책이 아니다. 이상적인 산책은 ‘태평한 미아’라고나 할까.” (-본문 22p중에서) ‘산책’이라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이 정도로 인생의 깊이를 표현할 수 있는 만화는 정말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느끼게 되는, 이 뿌듯하고 푸근한 느낌은, 스토리와 그림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일체감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고양감’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어린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은 결코 알 수 없을, 어른만이 알 수 있는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이 책을 통해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오? 목욕탕 발견! 발견한 김에 한 바탕 땀을 씻어내고 갈까. 씻고 나와서 선물을 고른 다음, 후나야도(일본 시나가와에 있는 ‘후나야도 텐푸라 미우라야’라는, 튀김이 맛있기로 유명한 가게를 가리킨다. )의 튀김과 함께 맥주 한 잔... 캬~! 죽이겠다.....” (-본문 27p중에서) 이 작품은, 원작자인 쿠스미 마사유키의 말에 따르면, “통판생활”이라는 잡지에 2000년 여름 호부터 연 4회, 2년 동안 1화 당 8페이지씩 연재하기로 약속하고 연재된 작품이라고 한다. 편집부 측으로부터 “고독한 미식가” 팀에서 ‘산책 만화’를 그릴 수 있겠느냐는 의뢰를 받아 시작된 이 작품은, 편집자의 주문에 따라 주인공은 ‘유부남으로 할 것’(독자층이 주부가 많기 때문에), ‘가끔은 부인도 등장시켰으면 한다.’는, 조금 까다로운 요구가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렇게 간단한 기획에서 시작된 이 깊이 있는 작품은, 분량이 8화밖에 되지 않아 너무 안타까울 정도로 훌륭한 완성도를 자랑하며, 주인공의 발걸음을 따라 8번의 산책을 마치고 나면 읽는 이에게 ‘세상과 삶에 대한 작은 깨달음 하나 정도’는 던져주는 책이다. “집에 있던 그림책은 어떻게 했더라. 어른이 되는 길목에 흘리고 간, 기억의 숲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아.” (-본문 35p중에서) 이 책의 띠지에 써져있는 마음에 든 홍보문구가 하나 있다. “우리의 고귀한 일상들에 바치는 아름다운 헌사”라는 문구였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주인공이 걷는 거리들을 주인공과 같은 기분으로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도 주인공처럼 “산책을 통해 발견하는 일상의 새로운 풍경과 거기서 비롯되는 여유로움”을 느껴보고 싶어졌고, 그런 의미에서 위의 홍보문구가 무척이나 마음에 와 닿았다. 주인공의 발걸음을 따라 천천히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 정도 인생의 의미를 알만한 나이의 독자라면 정말로, 이 작품이 “고귀한 일상에 바치는 아름다운 헌사”같은 작품임에 격하게 공감할 것이다. “이노모리 보고 나잇살이나 먹어갖고 자리를 못 잡아서 앞으로 어떡하나 싶었는데 평생 저런 식으로 잘 살아갈지도 모르겠군. 그보다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한다던 내가 더 한심해. 앞일을 알 수 없는 건 모두 마찬가지인 세대인데.” (-본문 47p중에서) 이 책은 본 내용에 해당하는 총 8개의 만화 에피소드, (후기를 대신하여)‘산책 원작 작업’, ‘원작 뒷이야기’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 각 화 당 8페이지로 이루어진 8개의 만화 에피소드는 “1화 에디슨 전구”, “2화 시나가와의 셋타”, “3화 중고 그림책”, “4화 히피 축제”, “5화 한밤중의 고야”, “6화 개와 연식 야구공”, “7화 하모니카 요코쵸”, “8화 메지로의 카키모치”로 이루어져 있다. 에피소드의 진행 방식은, 문구회사 영업사원인 주인공이 ‘우연히’ 시작하는 산보를 통해 접하게 되는, 일상의 다양한 풍경들을 세밀하고 섬세하게 소개함과 동시에, ‘삶의 깊이와 향기’를 문득 떠올리게 하는, 에세이형식의 짧은 ‘감상’들이 이야기 중간 중간에 덧붙여지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원작자인 쿠스미 마사유키가 ‘놀라면서’ 후기에 밝혔듯이, 이 작품 속에서 보여 지는 타니구치 지로의 작화는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고 무게감이 넘친다. ‘한 컷 그리는데 하루 걸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타니구치 지로의 섬세하고 리얼하게 표현된 ‘밀도 높은 그림’은, ‘거리의 현실적인 느낌’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느끼는 외로움, 뿌듯함, 애잔함, 우울함, 기쁨, 슬픔 같은 ‘감성적인 부분’까지도 읽는 이가 느낄 수 있을 만큼, 정말 대단한 경지를 선보인다. “역시 키치죠지에서는 이 구역이 제일 좋더라. 여기저기에 옛 세월들이 멈추어 선 채 살아 숨 쉬고 있거든. 옛날에는 이런 골목길이 마을마다 있었고,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무언가가 곳곳에 숨어있었는데. 이렇게 전선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처마들과 서서히 얽히고설키고 뒤죽박죽이 된 이 느낌이 왠지 편하고 좋아.” (-본문 73p중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말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소요유(逍遙遊)’라는 단어였다. 단어의 철학적 의미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자유롭게 거닐며 노닐다’라는 단어 그대로의 뜻이, 이 작품에서 말하는 ‘산책’의 의미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통해 표현되는 ‘우연한 산보’가 주는 가장 큰 기쁨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예상치 못한 풍경과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느낌을 발견한다는 것에 있고, 그런 ‘경이로운 발견’은 무언가를 의도했다거나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행한 ‘걷기’로는 절대 얻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책은 관광과는 다르죠. 목적 같은 거 없이 자기 마음대로 느긋하게 걷는 데서 오는 기쁨이거든요”(-본문 76p)라는 주인공의 대사처럼 말이다. “시대에 먹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어깨를 기대고 있는 것 같은, 오래된 거리의 함석지붕”이라는 묘사에 맞추어 그려진 세밀한 풍경 컷에, “조금만 더, 저 아래 숨어들어 있고 싶어졌어.”라는 주인공의 대사가 애잔하게 여운을 남기는 “하모니카 요코쵸”의 마지막 장면과 “죽기 전에 하고 싶었던 유일한 것이 아내와의 산책이었다.”는 내용이 담긴 어느 소설가의 짧은 독백이 흐르고, 언덕길 산책의 끝자락에서 주인공이 ‘우연히’ 아내와 마주치며 끝나는 “메지로의 카키모치”는, ‘경지에 이른 고수의 내공’이 느껴지는, 정말 완벽한 장면이었다. 일상 속에 숨겨진 삶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