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이 노리카 씨, 갑자기 쳐들어 와 오랫동안 신세까지 지고 정말 미안했습니다. 지금 미츠루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싶었어요. 올 봄, 나는 정리해고 당했습니다. 아내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고, 출장이라는 핑계로 상경했습니다. 결국 아들은 만나지 못했지만, 당신을 만나서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많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만일, 내게 딸이 있다면, 당신이 내 진짜 딸이었다면....계속 아들 녀석만 기다리지 말고, 킨지 군과 행복하세요. 그럼, 안녕히” 게이인 자신의 정체성을 더 이상 숨기고 살 수 없었던 미츠루는 과감하게 고향을 떠나 3년 전에 도쿄로 상경, 현재는 ‘여장 남자 바’에서 일하며 자유로운 도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날도 술에 취해 애인인 킨지와 함께 아무 생각 없이 방에 들어섰는데, 아버지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에 앉아있는 걸 보고 기겁, 여자처럼 화장하고 옷을 입은 관계로 자신이 아들인 미츠루인지 못 알아보고 “아가씨는 누구야?”라고 묻는 아버지에게 ‘미츠루의 애인인 노리카’라고 거짓말을 하고 만다. 나카무라 아스미코의 단편집, “짝사랑 일기 소녀”의 첫 번째 단편 “아빠와 아들과 방어 무조림”의 도입부다. “아빠와 아들과 방어 무조림”은, 게이로서, 여장 남자로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들의 모습을 2주의 시간동안 지켜보다 말없이 떠나는 무뚝뚝한 아버지의 이야기다. 도입부부터 경쾌한 코미디의 특징을 보이는 작품이어서 끝까지 이 유쾌하고 발랄한 분위기가 유지되나 했더니, 마지막 장면에서 가슴 속에 ‘무언가 울컥’하는 감동을 선사하는 이야기였다. “방어 무조림”이라는, 아버지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요리를 매개로 아버지와 아들간의 얼어붙었던 관계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이야기 전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들로 태어났지만 이제는 ‘딸’로 살아가는 자식의 모습을, 직접적인 방식보다는 우회적으로 돌려서 격려해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실은, 내가 전에 사귀었던 사람도, 엄청 늦게 오는 사람이었어. 약속 시간에, 정말이지, 기다릴 때는...어찌나 짜증이 나던지, 이 녀석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도대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니까. 하면서, 급기야는 헤어질 생각만 했는데, 그래도 막상, 그녀가, 너무 미안해 하며, 사과의 뜻으로 산 초콜릿을 들고, 종종 걸음으로 달려오면, 그저, 만난 게 기쁘고 좋아서 다른 생각은 아무 것도 안 나는 거야. 그러니 가는 편이 좋아. 아무리 늦어도.” 두 번째 단편 “기다리는 사람”은, 여섯 페이지짜리 짧은 이야기로, 항상 실수하고 덤벙거려서 남자에게 차여버리는 눈물 많은 여자와, 바로 얼마 전에 ‘그런 여자’와 헤어진 남자가, 그 해의 마지막 날 전철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소통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워낙 짧은 이야기인 탓에 그 후 그 남녀가 어떻게 됐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충분히 ‘행복한 결말’을 상상할 만하다. ‘만남의 순간’을 재미있고 유쾌하게 그려낸 단편이다. “틀림없어. 이 목소리다. 어젯밤 내게 말을 걸었던, 그 아이...이 100% 미소가, 영업용 스마일이란 걸, 알게 된 건 바로 어젯밤의 일” 세 번째 단편 “딸아이 또래의 소녀”는, 다소 위험하고 불순한 상상을 하게 되는, 아슬아슬한 느낌의 이야기다. 술에 취한 직장상사의 강권으로 원조교제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학생과 만나게 된 ‘아빠’,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귀여운 여학생이 딸 또래의 여자아이인걸 알고 얼른 그 자리를 피했지만, 다음날 ‘같이 축제에 가자’며 자신의 집으로 딸을 찾아온 딸의 친구는 바로 어제 만났던 그 소녀였던 것이다. 이 당돌하고 귀여운 소녀는 나이에 맞지 않는 능숙한 표정과 태도로 ‘친구 아빠’를 상대로 ‘협박’과 ‘유혹’을 펼치고, 결국 소녀의 바람대로 아빠는 “딸의 친구”와 함께 축제 구경을 가게 된다. 마지막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이 ‘안 어울리는 커플’의 뒷모습은, 읽는 이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결말장면이었다. 다소 위험한 소재이긴 하나 스토리, 연출, 작화의 밸런스가 아주 잘 잡힌 단편이어서 읽는 이가 이야기에 몰입하기 좋다. 완성도가 매우 높고, 마지막의 잔잔한 여운이 꽤 길게 남았다. “원래는, 누나와 이 사람이 데이트를 했겠지. 난 이 사람을 속인 거야...” 네 번째 단편 “체인지해서 만나요”는, 재미있고 쾌활한 분위기가 끝까지 지속되는 구조가 무척 맘에 드는 이야기였다. “만남 사이트”를 통해 데이트 약속을 잡은 누나를 골탕 먹이려고, 누나의 옷과 신발을 신고 화장을 한 채, ‘여장’을 하고 약속 장소에 나간 남동생과 역시 유부남인 형의 대타로 그 자리에 나온 남동생의 ‘하룻밤 데이트 이야기’가 이 단편의 내용이다. 마지막에 ‘진실’을 알게 되어 서로가 유쾌하게 헤어지는 결말이 꽤나 상큼했다. “보건 교사가 되어 좋은 것이라곤 뭐 하나 없지만, 굳이 고르라면, 이~런, 전형적인 수재 안경 소년에게, ‘....모르겠어요.’라고, 말하게 하는 이 순간” 다섯 번째 단편 “원색 안경 남자 표본”은, 여덟 페이지짜리 짧은 이야기로, 두 번째 단편 “기다리는 사람”과 매우 유사한 형태의 단편이다. 분위기나 연출 구조까지 매우 비슷한데, 시력검사를 하는 순간의 아주 짧은 시간을 ‘임팩트’ 있게 만들어낸 이야기로, 여교사와 남학생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읽는 이에게 묘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말을 걸어본 적도 없다 그저 매일 아침 전철에서 바라보는 것뿐. 그래도 내겐 가슴 벅찬 사랑이었다.” 여섯 번째 단편은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짝사랑 일기 소녀”다. 평생을 교사로 살았던 완고하고 무뚝뚝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들은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아버지의 일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 일기에는 놀라운 비밀이 쓰여 있었는데, 그 비밀이란 바로 아버지가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소녀가 있었고, 그 소녀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학교의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그 여학생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어떤 행동을 한 건 아니다. 출근하는 전철에서 매일 ‘그녀를 그저 바라보기만 한 것’이 전부였고, 그 마음을 일기로 남긴 것이 다다. 아들은 아버지의 짝사랑 상대였던 그 여학생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에 빠져, 결국 일기장에 쓰인 힌트로 ‘그녀’를 찾아 나선다. 굉장히 재미있는 구성을 지닌, ‘아기자기함’이 살아있는 단편으로 이 작품을 표제작으로 삼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책의 맨 마지막엔 첫 번째 단편 “아빠와 아들과 방어 무조림”의 프리퀄 같은 짧은 이야기, “그런 추억”이 실려 있다. 미츠루와 아버지의 옛 추억이 여섯 페이지에 걸쳐 짧게 펼쳐진다. 무척 재미있는 책이다. 단편집으로서 완성도가 매우 높다. 추천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