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가, 배가 들어온다고 손을 흔들어주러 가자고 해서 같이 뒷산으로 올라갔다. “누나, 저 배에 누구 아는 사람 탔어?” “저 너머 마을에서 한달 일하면 매일 아침 된장국에 계란을 넣을 수 있댔어. 그러더니... 계란 따위 안 넣으면 어때. 그냥 다 같이 사는 게 제일 좋은 건데, 그치?” “맞아, 나도 찬성이야. 된장국엔 조개만 있어도 냄새 좋은 걸. 아침에 둑에 나가서 조개랑 돌김, 박박 긁어오면 돼. 그게 젤 맛있어.” 배가 오자, 누나랑 나는 손을 흔들었다. 배에서는 귤꽃처럼 작은 손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마 모두들 자기들이 가장 보고 싶은 사람으로 착각했을 거라 생각한다. (본문1~4p 내용에서 발췌) 사람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따뜻하고 아늑한 기억이 있다. 그건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일수도 있고, 연인과의 추억일수도 있고, 친구와의 술자리 기억일수도 있다. 모양새가 사람마다 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억들이 주는 효과는 모두에게 거의 비슷하다. 말이나 글로는 정의내리기 힘든 ‘아련하고 편안한 느낌’, 그 기억을 가진 당사자에게 ‘따뜻한 위안과 위로’를 전해주는 효과다. 각박한 세상살이에 힘들고 지칠 때마다 우울함과 자괴감에 빠지지 않도록 힘을 북돋아 주는 자신만의 치료제랄까? 항구로 돌아오는 배에 손을 흔들기 위해 예쁜 누나의 손을 잡고 뒷산으로 올라 간 귀여운 꼬마 아이, 누나와 나누는 ‘된장국’에 관한 짧은 대화, 그리고 서서히 보이는 배의 모습...사이바라 리에코의 “우리집” 첫 장면이다. 작품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이 첫 장면은 작품의 주인공인 꼬마 니타의 “따뜻하고 아늑한 기억”이다.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누나와의 추억’은 니타에게 삶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자 우울함과 슬픔을 날려주는 치료제 역할을 한다. 애잔하고 서정적인 느낌의 이 프롤로그가 끝나고 바로 시작되는 본문의 내용들은, 프롤로그만 보고 아름답고 잔잔한 그림동화 같은 내용을 기대한 독자라면(그리고 이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더더욱) 아마 엄청난 충격에 빠질 것이다. 그만큼 “우리집”이라는 작품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어지간한 인생경험이 있는 어른들이 봐도, 정말 만만치 않다. 된장국 냄새가 난다. 엄마랑 누나가 부엌에서 소리를 내고 있다. 난 기분이 너무 좋아서 자는 척 한다. 내 이름은 니타(二太), 형 이름은 장남이라 잇타(一太), 새로 생긴 누나 이름은 가노코라고 한다. 난 이 이름이 무척 예쁘다고 생각한다. (엄마 :) “무슨, 첫째라서 잇타, 둘째라서 니타가 아니야. 엄마 위에 올라탄 놈팽이들 순서대로 붙인 것뿐이야.” (잇타 :) “으아아 - 그럼 니타는 내 동생이 아닌 거였어-?!” (엄마 :) “바보 녀석. 씨만 다른 것뿐이야. 호들갑은...” (잇타 :) “다행이다, 니타야 ^^ ” (가노코 :) “어라? 엄마, 그럼 난?” (엄마 :) “넌 좀 특별한 경우야. 애초에 떼려고 했는데, 별별 짓을 다 해도 안 떨어지더라고, 그래서 생각했지, 아아, 이 애는 하늘이 내린 아이로구나 - 그래서 네 이름을 신(神)의 아이(子)라 해서, 가노코(神子)라고 한 거야.” (가노코 :) “엄마, 낳아주셔서 고마워요.^^ ” 누나 이름은 예쁜데다, 멋있기까지 하네, 하고 난 생각했다. (본문, 제 3화에서 발췌) “행동파 만화가”라는 별명, 영화?드라마의 “원작자”(5개), “호스티스 생활, 도박중독, 야쿠자와의 연애 등등” 믿기 힘든 파격적인 실제경험담들, 현재 일본에서 “여류만화가의 정상”으로 불린다는 사이바라 리에코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들이다. 1964년생인 사이바라 리에코는 다수의 잡지에서 “성인 지향의 개그 만화”를 그리다 1997년 본작 “우리집”으로 제 43회 문예춘추만화상을 수상하면서 업계의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후 자신의 육아경험과 결혼 생활을 소재로 한 “매일 엄마”, 자신의 경험담을 베이스로 한 “상경이야기(한국어판 제목은 ‘만화가 상경기’)”, “여자 이야기” 등을 발표하며 작가로서 명성을 얻는다. “우리집”, “여자 이야기”, “이케와 나”, “퍼머넌트 노바라”등이 영화화 되면서, 현재는 작품뿐만 아니라 사생활까지도 주목받는, 화제를 몰고 다니는 최고의 인기작가 반열에 올랐다. 여기에 소개하는 “우리집”은 사이바라 리에코에겐 대표작이자 출세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며, 어떤 의미로는 정식적인 데뷔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매춘, 마약, 폭행, 도박 등등 무지막지한 범죄행위가 일상다반사처럼 벌어지는, 쇠락한 어촌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매일 끼니를 걱정하고 엄마가 진 빚 때문에 한줌의 희망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어 내는 것이 전부인 한 가족의 이야기를, ‘언제나 웃는 꼬마 니타’의 시선으로 순수하게 풀어낸, ‘잔인하지만 절대 잊어선 안 될 삶의 진리’를 담고 있는 이야기다. “근데, 할매. 사람은 살면서, 어디까지다 힘든 거고, 어디까지가 행복한 걸까?” “그야 간단하지. 얻어먹고 살면 행복한 거고, 먹여 살려야 되면 힘든 거지. 그러다 보면 날씨도 좋고, 하늘도 맑고, 바람도 잘 부는, 죽기 딱 좋은 날이 온다. 그때까지가 힘든 거야.” (본문 제 98화에서 발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셋이다. 이들은 아버지는 다 다르지만 엄마가 같은 한 가족으로, 상냥하고 꿋꿋한 누나 가노코, 가족을 지키고 싶다는 일념 하에 어릴 때부터 일찍 세상의 잔혹함을 경험하는 장남 잇타, 항상 웃는 꼬맹이 니타가 “우리집”의 주인공이다. 매 화마다 2페이지의 짧은 그림동화 형식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가노코, 잇타, 니타의 시선으로 쇠락한 어촌의 풍경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인생사를 다루고 있다. 매 화마다 씁쓸함을 넘어선 슬픔이, 잔인함을 넘어선 처절함이 느껴질 정도로 ‘잔혹한 이야기’들이 ‘내용과는 정말 안 어울리는 귀여운 그림체로’ 리얼하게 펼쳐지지만, 세 명의 아이들은 ‘그저 가족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웃음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은 혼자 떨어져 살던 가노코가 잇타, 닛타와 만나는 시점부터 시작해서 결국엔 더 버티지 못하고 셋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슬픈 결말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는데, 맨 마지막 장면에서 닛타의 미소가 전해주는 가슴 먹먹한 슬픔은 요 근래에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무지막지한 ‘울림’이었다. 여러 사람들에게 ‘꼭 한번 읽어봐’하며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지만,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반응들이 안 좋을까봐 솔직히 많이 두렵다. 아이들에겐 절대 권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고, 개인적으로는 정말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