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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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 짝사랑 팩

“때때로 잊어버릴 때가 있다. 나는 지금 선생님이었다. 10년 만에 모교로 부임한 탓인지 때때로 내 안에서 10년 전 내가 되살아난다.” “가장 완벽한 사랑은 짝사랑이다.”라는 명언과 연관되는 ‘그런 시절’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런 시절’이라 함은, 나를 비...

2013-02-14 김현우
“때때로 잊어버릴 때가 있다. 나는 지금 선생님이었다. 10년 만에 모교로 부임한 탓인지 때때로 내 안에서 10년 전 내가 되살아난다.” “가장 완벽한 사랑은 짝사랑이다.”라는 명언과 연관되는 ‘그런 시절’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런 시절’이라 함은, 나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사랑’이라는 설레는 감정을 경험해 본 청소년기가 아닐까 하는데, ‘청춘’이라 불리는 그 시절도 한참을 지난 지금,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본 지금에 와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사랑의 감정은 당사자의 순수성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그들이 그려내는 사랑은 ‘서로를 향한 한없이 무조건적인 애정’을 연출하게 되고, 혹자는 극단적이고 어리석다 말할지 몰라도, 아름답고, 뜨겁고, 달콤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위와 같은 상태가 가장 극단적으로 치달아 최고조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상대를 바라보기만 하는 짝사랑’일 때라고 보는데, 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며 일방적인 애정’은 내 경험상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고, 설령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그것이 짝사랑의 단점이자 장점이기도 한데, 왜 장점이라는 표현을 쓰냐면,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삶에 찌들어도 그때 그 순간의 감정과 추억만큼은 퇴색되거나 변색되지 않고 당사자의 가슴 속에 영원히 아름답게 간직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카와치 하루카의 “진공 짝사랑 팩”이란 작품은, 고등학교를 무대로 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같은 만화로, 그 ‘달콤쌉싸름한 느낌의 독특함’ 때문에 읽는 재미가 꽤나 쏠쏠한 작품이다. “만약에 제가 좋아한다고 하면 사귀어 줄래요?” 이 책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최근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작가 카와치 하루카의 짝사랑 3부작 “진공 짝사랑 팩”, 고등학생의 마음을 간직한 채 교사가 된 나, 그런 줄은 모른 채 그녀를 사랑하는 나, 몰래 그를 좋아하는 나. 고등학교를 무대로 펼쳐지는 짝사랑 연쇄 반응의 행방은…. 짝사랑 3부작과 오리지널 완결편까지 초기 걸작 단편 4편이 수록되어 있다.」[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열 살이나 어린 남자한테 내가 흔들렸어?!” 이 작품은 총 8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책이다. “책은 보고 있었다”, “진공 짝사랑 팩”, “케세랑파사랑”, “이 앞에”라는 제목의 네 개 에피소드는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어있는 에피소드로 작품의 타이틀이기도 한 “진공 짝사랑 팩”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야기다. 이 4개의 에피소드가 끝나면, “카와치 하루카 초기 걸작선”이라는 속표지 이후로 “사치코의 결혼”, “DOOWUTCHYALIKE”, “스킵한 날”, “새언니의 우울”이라는 제목의 네 개 에피소드가 부록처럼 수록되어 있다. “익숙한 교실, 변함없는 교복, 불 보듯이 뻔한 것, 10년 전 나는 저쪽에 앉아 있었다. 풍경이 겹쳐진다. 어리고, 가능성도 많지. 누구한테 들이대건 죄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저 할 말만 하고 뻔뻔하게 내빼다니....고등학교 때 나는 ‘사제 교제’에 반대했었다. 가까운 어른을 동경할 시기라는 것은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선생한테 들이대는 애들이 혐오스러웠고 그에 응하는 로리콤들도 탐탁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꼴은 뭔데?” 이 책의 ‘본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앞의 네 가지 에피소드는 만화적 재미와 영화적 감수성이 아주 절묘하게 버무려진 이야기로, 읽고 있으면 “야~ 정말 잘 만든 스토리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작품이다. 모교에 교사로 부임한 오노는 10년 전 자신이 여고생이었던 시절의 마음을 가슴 한 구석에 몰래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제자인 사쿠라이가 별안간 고백을 해오고, 10대 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진 그녀는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남학생 사쿠라이를 보면서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을 겪는다. 이것이 첫 번째 에피소드인 “책은 보고 있었다”의 주요 줄거리인데, 사랑의 감정이 주는 비밀스러운 설렘, 고백을 받은 여성의 심리, 과감하고 섹시한 연상의 여인의 모습 등 다채로운 상황 연출이 상당한 재미를 주는 에피소드다. 이 에피소드는 주로 교사인 오노의 시선과 심리 위주로 진행되는데, 오노의 시선과 생각을 통해 ‘여성의 내밀한 속마음’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두 번째 에피소드인 “진공 짝사랑 팩”은 첫 번째 에피소드인 “책은 보고 있었다”의 시간적으로 바로 앞에 해당되는 이야기로 이번엔 제자인 사쿠라이의 시선과 감정으로 오노 선생을 바라보는 스토리가 진행된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사쿠라이가 오노 선생을 보고 반하게 된 계기와 그 이후부터 무럭무럭 자라나게 된 짝사랑의 감정이 어떻게 표출되어 결국 고백까지 하게 되는지의 과정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보여준다. 에피소드의 맨 마지막은, 도서실에서 사쿠라이가 오노 선생에게 “만약에 제가 좋아한다고 하면 사귀어 줄래요?”란 대사로 끝을 맺는데, 이 대사는 첫 번째 에피소드인 “책은 보고 있었다”의 가장 첫 장면에 나오는 대사로 이 두 가지 에피소드를 절묘하게 연결해 주는 장치 역할을 한다. 세 번째 에피소드인 “케세랑파사랑”은 두 번째 에피소드인 “진공 짝사랑 팩”과 이야기 중간에 절묘하게 결합하게 되는 에피소드인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쿠라이를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는 같은 반 여학생 테라시마다. 앞의 두 편과 같이 이 에피소드는 테라시마의 시선과 감정을 따라 진행되며 ‘엇갈린 사랑’의 대명사인 “짝사랑”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야기 중간에 테라시마가 던진 공에 맞은 사쿠라이가 양호실에 가게 되는 장면이 두 번째 에피소드와 시간적, 공간적으로 절묘하게 겹쳐지는 장면에서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위의 세 가지 에피소드를 정리해주는 느낌의 완결편인 네 번째 에피소드 “이 앞에”는 사쿠라이가 졸업한 지 3년 후의 이야기로 아주 간단한 구성을 지닌다. 시간이 흘렀어도 오노 선생과 사쿠라이가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일종의 ‘에필로그’ 같은 이야기다. 부록처럼 수록되어 있는 ‘초기 걸작선’ 네 개의 단편들도 다 완성도가 높다. 무척 재미있는 책이다. 짝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한 권이라 읽기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