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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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s

“눈을 뜨니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눈을 떠봤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희미하게 공장지대가 있는 바다 냄새가 났다. 목이, 목이 아프고 토할 것 같았다. 눈앞도 머릿속도 뿌옇게 흐렸다. 소변도 지린 것 같다. ‘하지메씨...!!’, ‘하지...

2013-02-12 유호연
“눈을 뜨니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눈을 떠봤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희미하게 공장지대가 있는 바다 냄새가 났다. 목이, 목이 아프고 토할 것 같았다. 눈앞도 머릿속도 뿌옇게 흐렸다. 소변도 지린 것 같다. ‘하지메씨...!!’, ‘하지메씨...!!’, 남자가 세게 끌어안았다. ‘당신 누구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내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걸 깨달았다.” ‘느와르(Noir)’란, 원래 “검은, (얼굴, 피부가) 거무스름한, 까무잡잡한”이란 뜻의 형용사다. 그랬던 단어가 영화나 소설 같은 예술 계통에서 하나의 ‘장르’를 지칭하는 말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필름 누아르(film noir)’란, “주로 암흑가를 무대로 한 195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를 가리켜 프랑스 비평가들이 붙인 명칭이며, 18∼9세기 프랑스에 유입된 영국의 고딕소설을 로망 누아르(roman noir)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였다. 일명 다크 필름(dark film)이라고도 한다. 1940년대 할리우드는 암흑가를 무대로 한 새로운 양식의 영화를 선보여 195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 간 인기를 끌었다. 영화는 범죄와 파멸이 반복되는 지하세계의 운명을 자동차 브레이크의 파열음과 총소리가 뒤섞인 음향, 희미한 담배연기가 깔린 듯한 어둡고도 우울한 영상으로 표현하였다.(출처 : 두산백과사전)”, 즉, “누아르”란 주로 범죄와 폭력을 다루면서 도덕적 모호함이나 성적 동기에 초점을 맞추는 일군의 영화나 소설 등의 예술장르를 가리킨다고 보면 될 것이다.(단어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뜻도 ‘검은, 어두운, 우울한’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때 ‘홍콩영화의 황금기’라 불리던 시기엔 ‘홍콩 누아르’란 타이틀을 단 “갱스터 무비”들이 무더기로 수입되어 1년에 수십 편씩 한국의 극장에 걸리던 시절도 있었다. “당신의 이름은 다나카 하지메. 당신과 나는 야나세라는 조직 폭력단의 간부였습니다. 나이는 저와 같은 28살, 야나세 조직은 카와구치라는 조직과의 항쟁에서 패했습니다....야나세파 두목과 지금의 카와구치파 4대 두목인 에비나 씨는 카와구치 3대를 모시던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지만, 3대께서 후계자로 에비나 씨를 지명하면서 야나세파 두목님이 3대를 살해. 카와구치 조직은 총력을 쏟아부어 배신자인 야나세 조직을 토벌. 야나세 조직은 괴멸 상태가 된 겁니다. 카와구치 쪽에선 당신을 죽이고 묻어서 처리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카와구치파 놈들이 알게 되면 죽이려 들 겁니다. 이 맨션 밖으로 절대 나가지 마십시오.” ‘야오이(やおい)’란, 원래 일본어의 “야마나시(주제, 극적상황, 절정 등이 없음), 오찌나시(결말이 없음), 이미나시(의미가 없음)”의 앞 글자를 딴 것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주로 “BL(Boys Love)”이라는 말로 대체되고 있다. 이 장르는 위의 뜻 그대로 “남자와 남자 간의 동성애”를 소재로 삼아 창작하는 장르를 뜻한다. 주로 소년만화 등의 2차 창작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1차 창작물도 물론 매우 많다), 캐릭터 간의 우정이나 라이벌 의식을 사랑이나 연애 감정으로 해석하여 연인 사이로 그려낸다. 꽤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주 소비층 대부분이 여성이다. “당신이 죽었을 때 한 번이라도 해봤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죽어버릴 거라면 거부한들, 약을 써서 한들...어떻게 한들, 당신을 덮쳐버릴 걸 그랬다고.” 여기에 소개하는 일본 만화 “gives”는 위에 설명한 두 가지 장르, 즉 ‘누아르’와 ‘야오이’를 합쳐놓은 작품이다. 폭력조직 간의 항쟁 중에 운명이 뒤바뀌어 버린 두 명의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극단적인 사랑의 모습’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작품인 것이다. 읽는 내내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기타노 다케시의 야쿠자 영화’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작품의 주제는 “이 잔혹한 세계에서 가장 절대적인 가치는 사랑뿐”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라다는 나에게 친절하다. 내가 말을 듣도록 자신의 부하에게 린치를 가하는 걸 보면”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인 기타노 다케시의 야쿠자 영화 “아웃 레이지(2010)”를 보면, ‘야쿠자’라는 범죄조직의 세계를 묘사함에 있어 과장이나 허구를 최대한 배제하려고 무척이나 애쓴 흔적이 보인다. 이 누아르 영화의 영상은 한없이 건조하고 차가운데, 일상의 평안한 풍경이 흘러가는 심심한 순간에 느닷없이 잔인한 폭력이 행사되는 장면을 여과 없이 집어넣음으로서 ‘폭력의 일상성’을 강렬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전반적으로 매우 음울하고 쓸쓸한 느낌을 주는 영화였다. 기타노 다케시가 연출한 또 다른 야쿠자 영화 “소나티네(1993)” 같은 경우엔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프로페셔널한 야쿠자인데 비해 이들이 움직이는 무대는 아주 한적하고 평화로운 섬, 오키나와로 설정되어 있다. 인물과 배경이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영화는 처음이었는데, 그 이질적인 두 개의 요소가 영상 속에서 아름답게 어우러져, 보는 이에게 애잔한 슬픔이 전달되는, 기묘한 울림 같은 묘한 느낌이 있었다. “gives”는, 전반부에는 “아웃 레이지”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고자 작가가 매우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주인공인 하지메와 하라다의 절망적이고 극단적인 느낌을 부각시키기 위해 야쿠자 세계의 비정함이나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폭력, 타인에 대한 인정(人情)이나 배려 따위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뒷세계’의 권모술수나 음모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느와르 장르를 표현하기엔 그림이 조금 약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도 들지만, 전반적으로 작품의 분위기나 스토리, 여운이 남는 연출 같은 부분이 매우 좋았다. 작품의 결말에 해당되는 후반부에는 “소나티네” 같은 분위기를 표현하려고 작가가 매우 노력한 모습이 보인다. 배신과 거짓말, 음모와 폭력으로 얼룩진 폭풍 같았던 도시에서의 날들이 지나가고, 아름답게 맺어지진 못했지만,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와 위치를 알게 된 두 남자의 애잔한 마음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섬의 풍경 속에서 조용하게 펼쳐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두 남자의 어색한 미소가 꽤 긴 여운을 남겨주었다. “하라다는 거짓말쟁이다. 이익만을 추구하는 의리도 인정머리도 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다. 나를 감금하고서는 내 엉덩이를 범하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주고, 나를 때리는 일은 전혀 없고, 내가 만든 요리를 먹고, 내가 잘 때면 항상 이불을 덮어주는, 나에게만 상냥한 하라다.” 작가인 야마나카 히코는 이 작품 외에도 주로 “BL” 장르의 작품들이 삼양출판사를 통해서 한국어판으로 소개되어있는데, 다른 작품으로는 “신분대학교 남자기숙사 이야기”, “앤드 게임”, “마루스미야의 신부맞이”, “왕자님과 작은 새”, “첫사랑의 70%는” 등이 출간되어있다. 여기에 소개한 “gives”는 한 권짜리라 읽기도 좋다. 추천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