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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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 랑데부

“이별의 꽃조차 택하지 않고 계속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좋아.” “세키네 씨의 사랑”이 한국어판으로 소개되면서 국내 독자들에게도 서서히 이름을 알리고 있는 일본 만화가, 카와치 하루카의 대표작 “여름눈 랑데부”가 삼양출판사를 통해 국내에 정식으로 발매되었...

2013-02-08 김진수
“이별의 꽃조차 택하지 않고 계속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좋아.” “세키네 씨의 사랑”이 한국어판으로 소개되면서 국내 독자들에게도 서서히 이름을 알리고 있는 일본 만화가, 카와치 하루카의 대표작 “여름눈 랑데부”가 삼양출판사를 통해 국내에 정식으로 발매되었다. 독특한 설정과 색다른 감수성을 무기로 ‘기존에 보기 힘들었던 특별한 러브스토리’를 독자들에게 선사하고 있는 카와치 하루카는, 한마디로 말해서 읽는 재미도 있고, 읽는 보람도 있는 작가다. 현재(2012.12) 한국어판으로 3권까지 발매된 “세키네 씨의 사랑”이나 2권까지 발매된 “여름눈 랑데부” 모두, ‘전체적으로는 심심한 듯 보여도 날카로운 임팩트를 곳곳에 숨겨놓은’ 잘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한번쯤 접해보면 좋을 것 같아 소개한다. “여기서 알바를 시작한 지 몇 개월. 무엇을 숨기랴. 첫눈에 반했던 것이다. 일주일에 이틀 빼고 거의 매일같이 작은 화분을 사러 갈 정도의 단골손님이 되어가던 내게 운명의 여신은 다리를 벌렸다....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그런 대상이 아닌 채로 곁에 있는다는 건 행인 A였던 시절보다 몇 백배나 더 씁쓸하다.” 이 책의 1권 띠지에는 이런 홍보문구가 적혀있다. “남겨두고 떠나는 쪽과 홀로 남는 쪽, 어느 편이 더 괴로울까...?”, 이 문구를 통해서만 유추해보면, 이 책의 내용은 무언가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일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그 옆의 간략한 내용 소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쿨 핸섬 아르바이트 청년, 꽃집을 경영하는 젊은 미망인, 그리고 저세상으로 가지 못 한 채 집착하는 초식남 유령, 기묘하면서도 애틋한 세 사람의 삼각관계”, 잘~나가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웬 유령?”, 그것도 “초식남 유령”이라니?, 이때부터 이 만화가 ‘결코 평범하지 않은 러브스토리를 담고 있구나.’ 라고 슬슬 긴장하게 되는 것이다. “난 말이죠, 아츠시 씨. 조만간 당신 아내를 내 걸로 만들겁니다.” 예전에 엄청난 대박을 쳤던 할리우드 영화가 한 편 있었다. 국내판 제목은 “사랑과 영혼”, 지금은 암으로 죽어버린 당대의 청춘스타 패트릭 스웨이지와 요즘엔 “에쉬튼 커쳐”라는 열여섯 살 밑의 연하남과의 이혼으로 더 유명한 왕년의 섹시스타 데미 무어가 주연을 맡았던 이 판타지 영화는, “죽은 남편이 홀로 남은 아내를 위해 유령의 모습으로 그녀 곁을 떠돌며 위험으로부터 지켜준다”는, 가슴 절절한 스토리를 아름답게 풀어내며 흥행에 성공했었다. “여름눈 랑데부”는, “사랑과 영혼” 같이 가슴 절절한 러브스토리는 아니지만, 상당히 비슷한 설정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일단 죽은 남편이 유령의 모습으로 홀로 남은 아내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기본적인 설정은 유사함을 넘어 아예 똑같다. 하지만 이 작품은 설정이 그럴 뿐이지 그 영화와는 아예 다른 색깔, 다른 스토리를 지닌, ‘의외성’이 숨어있는 작품이다. 1권의 도입부부터 독자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게 되는 것은, 여주인공 로카를 짝사랑하고 있는 연하남 하즈키의 존재다. 길거리를 오고가다 꽃집 사장 로카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하즈키는 거의 매일을 빠짐없이 꽃을 사러 들락거리다가 아예 아르바이트생으로 눌러 앉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다. 어찌 보면 음흉한 의도를 지닌 청년이지만, 자신의 속마음을 결코 밖으로 내색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로카의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미망인을 상대로 안타까운 짝사랑에 빠져 있는 잘생긴 순정 연하남’이랄까? 작가는 바로 이 부분부터 이야기를 시작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슬슬 작업을 걸기 시작’한다. “어렸을 적 고열이 난 이후로 나는 오른쪽 귀가 조금 멀었다. 그래서 그녀는 기본적으로 내 왼편을 걸었고 그건 암묵의 특등석이었다.” 하즈키의 짝사랑이 서서히 독자들에게 익숙해져 갈 무렵, 로카의 생일을 계기로 데이트 기회를 잡은 하즈키의 눈에 갑작스럽게 유령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절묘한 방향으로 급작스럽게 흘러가게 되는데, 로카의 죽은 남편인 아츠시는 ‘연적(戀敵)’인 하즈키의 눈에만 보일 뿐, 죽어서까지 곁을 떠나지 못하는 사랑스러운 아내 로카의 눈에는 정작 보이질 않는다. (이쯤 되면 독자는 이미 작가의 낚시질에 완벽히 걸려든 타이밍이다.) 하즈키의 몸을 빌려서라도 로카에게 자신의 존재와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유령 아츠시, 자신에게 흔들리는 로카의 마음을 알고 좀 더 적극적으로 대시하고 싶지만 유령의 방해 때문에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하즈키, 한참 전에 죽어버렸지만 아직도 여전히 자신의 마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츠시와 ‘실체가 있는 싱그러운 젊음’으로 자신에게 사랑을 어필하는 8살 연하의 하즈키 사이에서 갈등과 고민에 빠진 로카, 이 셋의 기묘한 삼각관계가 이 작품을 본격적으로 재미있게 만드는 ‘관계의 시작’이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말이지. 병에 걸린 건 당신 탓이 아니라도 점장님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 확실히 당신 탓이야. 그쯤 하고 나한테 양보하지?” 죽은 남편의 유령과 싱싱하게 살아있는 연하남이 자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싸운다니,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최고의 로맨틱한 상황이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정작 여자의 눈에는 죽은 남편의 유령이 보이질 않는다는 것, 공교롭게도 유령은 연하남의 눈에만 보인다는 것이 이 작품의 재미와 감동을 배가시키는 설정의 핵심이다. 특이한 설정에서 비롯된 등장인물들의 ‘절묘한 엇갈림’은, 독자들에게 긴장감과 흥미진진함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효과는 ‘사랑에 관한 색다른 시선’을 독자들에게 매번 환기시켜준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사랑이란 개념에 대한 고민’은 아직도 명확하게 ‘하나의 답’으로 정립된 적이 없다. 그만큼 사랑이라는 감정과 형태가 상대와 조건, 상황에 따라 천변만화하기 때문인데, 그 다양한 모습과 절실한 감정을 이런 형태로 적용시켜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이런 색다른 감수성과 독특한 설정이 카와치 하루카가 가진 ‘작가로서의 진정한 재능’인 것 같다. 일본에서, 책은 4권으로 완결이 났고, 동명의 애니메이션도 총 11화로 방영이 끝났다고 한다. 애니메이션도 평이 아주 좋은데,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봐야겠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