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결혼
“...어릴 땐...이런 비탈길 따위, 단숨에 꼭대기까지 달려 올려가곤 했는데. 이런 자리에 앉아 쉬고 있는 아줌마를 보며 ‘궁상~’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랬구나. 여기 앉으면 이런 풍경이 보이는구나. 나이 들기 전엔 몰랐어...많은 고민 끝의 귀향이었지만...여기서...
2013-02-01
유호연
“...어릴 땐...이런 비탈길 따위, 단숨에 꼭대기까지 달려 올려가곤 했는데. 이런 자리에 앉아 쉬고 있는 아줌마를 보며 ‘궁상~’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랬구나. 여기 앉으면 이런 풍경이 보이는구나. 나이 들기 전엔 몰랐어...많은 고민 끝의 귀향이었지만...여기서 늙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조용하고 평화로운...조금 이른 노후. 이제 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남자의 일생”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소재의 작품이 한국어판으로 소개되면서 우리나라에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일본의 순정만화가 니시 케이코의 신작 “언니의 결혼”이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현재(2012.12) 한국어판으로 2권까지 나와 있는 이 작품은 전작인 “남자의 일생”에 이어 이번에도 “독신여성의 일과 사랑”을 소재로 삼아 여성 독자들과의 공감대를 ‘살며시’ 이끌어내는 뛰어난 연출력을 선보이고 있다. “여동생 루이코는, 옛날부터 이런 식이었다. 나와는 꽤 나이 차이가 나는데, 그 어린 나이와 귀여움을 무기로, 뭐든 자기 고집대로 하는 아이였다. 그리고 나는, 그걸 너그럽게 봐 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동생이 갑자기 찾아온 것이, 영 유쾌하지 않다....” 50대 노교수와 30대 커리어 우먼간의 로맨스를 ‘조용한 감성’으로 그려낸 전작 “남자의 일생”에서, 작가는 ‘사랑’이라는 것을 “열정적이고 끈적거리며 사람을 망가트리는, 한여름의 폭풍 같은 감정”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외롭고 심심한 사람들끼리 서로 보듬어주고 일상의 허전함과 무료함을 달래주는, 따뜻한 봄바람 같은 감정”으로 묘사한다. 난 니시 케이코의 이러한 ‘사랑관(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물론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격정적이고 극단적인 사랑”도 이 세상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사랑은 아주 극소수일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이라는 것은 삶의 외로움을 잊게 해주는 자그마한 온기 같은, “조용하고 따뜻한 사랑”의 형태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러나 ‘리얼함’만으로는 “스토리”가 될 수 없다. 사람이 사실적인 것만을 보려한다면 무엇하러 시간과 비용을 들여 소설이나 만화를 읽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겠는가?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 아니라면 작가는 무언가 ‘드라마틱한 것’, 사람의 가슴을 파고드는 서사적 구조, 즉 ‘내러티브(narrative)’를 창조해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니시 케이코는 자신만의 독특한 ‘내러티브’를 지닌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작가 본인이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사랑’의 모습이 아무리 심심하고 조용한 것일지라도, 이 작가의 작품에는 독자들을 빠져들게 하는 스토리와 연출, 반짝이는 감수성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소개하는 신작 “언니의 결혼”에서도 작가의 이런 재능은 빛을 발한다. “아아...맞아요!...전학생이었는데....머리는 부스스하고 피부는 새하얗고 뚱뚱하고! 명색이 의사 아들이면서 성적은 고만고만, 성격도 칙칙하고...늘 밑에서 사람을 올려다보는 느낌에....아, 맞다! 별명이 ‘화이트’! ‘화이트 포크’의 ‘화이트’! 늘 괴롭힘을 당하고는 화장실에서 울곤 했는데....” 전작인 “남자의 일생”에서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커플의 다소 파격적인 사랑을 보여주면서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였다면, 이번 작품인 “언니의 결혼”에서는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자신을 따라다니는 유부남과 불륜에 빠져버리는 30대 후반 커리어 우먼의 모습을 세밀하게 보여주면서 독자들의 관심을 유발한다. ‘짝사랑’을 넘어서서 거의 병적인 수준으로 여자 주인공 이와타니에게 집착하는 정신과 의사 마키는 잘생긴 외모와 훤칠한 키, 다정다감한 매너와 지적인 말투로 여성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은 ‘유부남’이다. 그러나 마키에게는 현재의 ‘킹카’ 모습만 본다면 누구도 믿지 않을 비참하고 끔찍한 과거가 있다. 중학생 시절의 마키는 ‘화이트 포크’라 불리며 동창들에게 매일매일 괴롭힘과 왕따를 당하던 못생기고 뚱뚱한 소년이었다. 그랬던 그에게 용기와 애정을 보여준 유일한 친구이자 이성(異性), 이와타니 요리는 ‘능력 있고 멋진 남성’으로 성장한 지금에도 도저히 잊을 수 없고 어떻게든 갖고 싶은 ‘절대적인 여자’인 것이다.(다소 정략적인 냄새가 풍기는, ‘계산적인 결혼’을 할 때도 이 ‘병적인 감정’은 그대로 적용됐는데 마키의 와이프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와타니와 같은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로 외모가 매우 비슷하다.) 마키는 자신이 ‘백돼지’라 불리던 시절부터 현재까지, 스토커를 방불케 하는 수준으로 이와타니를 지켜보고 있었고, 이 작품이 재미있는 점은 정작 당사자인 이와타니는 그런 사실이나 낌새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여자 주인공인 이와타니는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타입’이 아니다. 직업이 현립 도서관 사서인 그녀는 원래 근무지인 도쿄에서 일부러 고향으로 돌아올 정도로, ‘편안하고 조용한 노후’를 일찍부터 준비한, 매우 ‘심심한 타입’인 것이다.(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건어물녀’ 같은 타입이랄까?) 이런 이와타니에게 마키는, 예전부터 준비해온 치밀한 방법으로 서서히 접근해 그녀의 평안하고 조용했던 일상을 마구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마키의 정체’를 알게 된 후부터, ‘자신에게 오랫동안 집착해온 타인이 있었다.’는 ‘무거운 사실’을 인식해버린 이와타니는 복잡하고 심란한 감정에 휘말려 조금씩 조금씩 그녀가 지향했던 삶의 모습과 멀어지기 시작한다. “뭔가의 스트레스 해소용이 되거나, 누군가의 대역이 되거나, 편리하게 이용해 먹거나, 혼자라는 건 그런 것이기도 한 거구나. 그래도 이젠 싫어, 설령, 사랑이라도 사양하고 싶어” 작가는 남녀주인공의 ‘오랜 인연’을 이용해 ‘매우 특이하고 파격적인 도입부’를 보여줌으로서 ‘불륜’을 ‘로맨스’로 바꿔나가는 작업을 천천히 진행해나간다. 그 작업의 진척 속도가 ‘매우 조심스럽고 느려서’ 사실 1권에서는 작품에 몰입하기가 힘들 정도다. 하지만 2권에 접어들게 되면, 작가가 그간 조심스럽게 깔아놓은 ‘밑밥’들과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되는 여자 주인공의 현재가 맞물리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짜릿하게 변해간다. 일종의 ‘화학작용을 통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재미있어 진다는 얘기다. 이 작품은 청소년들이 보기에는(스토리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다소 수위가 높다.(그렇다고 야한 장면이 남발되는 건 아니다.) 여자 주인공 또래의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