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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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시 걸

“밤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저는 어젯밤 당신이 구해주신 전어입니다.” 인생의 씁쓸한 맛과 따뜻한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매우 독특한 만화 한 편이 출간되었다. 대원씨아이를 통해 한국어판 1권이 출간된, 일본 작가 야스다 히로유키의 “스시걸”이다. 요 근래...

2013-01-31 김진수
“밤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저는 어젯밤 당신이 구해주신 전어입니다.” 인생의 씁쓸한 맛과 따뜻한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매우 독특한 만화 한 편이 출간되었다. 대원씨아이를 통해 한국어판 1권이 출간된, 일본 작가 야스다 히로유키의 “스시걸”이다. 요 근래엔 찾아보기 힘들었던, 귀엽고 특이한 판타지 느낌의 작화와 삶의 성숙한 향기가 묻어나는 스토리를 절묘하게 합쳐놓은 작품으로, 마치 어른과 아이가 한 몸에 공존하고 있는듯한 유니크한 감성이 돋보이는 수작(秀作)이다. “취해서 얼떨결에 집어 든 바싹 마른 전어 초밥 접시, 평소의 나라면 절대 집지 않을 궁상맞은 초밥, 아무래도 그게 이 녀석을 구했던 모양이다....” “스시걸”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생선초밥이라는 뜻의 ‘스시’와 소녀라는 뜻의 ‘걸(girl)’이 합쳐진 인물들이 등장하는 만화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매 에피소드마다 다른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스시가 여자의 모습으로 바뀐 특별한 어떤 존재’다. 가령 첫 번째 에피소드인 “전어 씨” 같은 경우엔, ‘바싹 마른 전어 초밥’을 의인화한, 머리에 전어회를 얹어 놓은 참하고 예쁜 아가씨가 등장한다. 마치 ‘스시나라에서 온 요정’ 같은 외모의 이 아가씨는 초밥집에서 자신을 집어준 한 여자에게 나타나 그녀의 곁을 지켜준다. 두 번째 에피소드인 “오징어 양” 같은 경우엔, ‘생기발랄한 청춘 같은 오징어 초밥’을 의인화한, 머리에 오징어회를 얹어 놓은 여고생 복장의 귀엽고 활발한 여학생이 등장한다. ‘오징어 양’ 역시 자신을 집어준 인기 없고 외로운 여교사의 방에 나타나 그녀의 곁을 지켜준다. 이 작품의 설정과 구조는 그 ‘뛰어난 독특함’ 때문에 사실 말과 글로 설명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최대한 간결하고 쉽게 설명한다면, “스시요정이 나타나 삶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이야기”랄까? “흐응~ 초밥의 은혜 갚기라, 혹시 돈이라도 주려고?(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전어 씨) 마법 같은 거 쓸 줄 알아?(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전어 씨) 어라, 그럼 뭐 하러 온 거야?” “스시걸”을 그린 야스다 히로유키라는 작가는 우리나라엔 이 작품 외엔 소개된 작품이 없는 아주 생소한 이름의 작가다. 출판사 블로그에 소개된 사항도 ‘야스다 히로유키, 신쵸샤 월간지 <@bunch!>에서 연재 중’이 끝이다. 책표지에 실린 작가의 말로 이 작품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일류 초밥 장인을 꿈꾸며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는 소녀...가 아니라 회를 머리에 얹은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착각하신 분들 죄송합니다.” 그렇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 가장 먼저 주지해야 할 사실은 이 작품은 절대로 “요리 만화가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요 1년 동안 전어 씨가 알게 된 것, 이 사람의 이름이 나츠미라는 것, 또 하나의 이름이 엘자라는 것, 장난이 심하고 털털한 성격이라는 것, 간호사가 되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포기했다는 것, 하지만 다른 형태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주고 있다는 것” 띠지에 쓰인 이 작품의 광고카피는 이렇다. “<심야식당>의 감칠맛 도는 감동을 한 접시에-인생사마냥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초밥집에서 만난 작은 스시 하나가 전하는 시큰달큰한 인생이야기”, 이 책을 읽어본 후에 느낀 감상은 이렇다. “<심야식당>하고 느낌은 비슷할지 몰라도 구조나 형태가 너무나 다른 작품”이라는 것(일단 무대가 “회전초밥집”이 아니다.^^) “으음...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 잠깐, 잠깐, 박수치지 마. 낳으려면 일도 그만둬야 하고, 돈도 없고, 술이랑 담배를 끊을 자신도 없는데다, 아마 그 녀석도 엄청 화낼 거야. 뭐? 얼굴이 웃고 있다고?” 이 책은 가벼운 요리만화려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느낌의 먹먹함을 독자의 가슴에 선사하는 ‘무서운 책’이다. 일단 스토리 자체가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인생의 쓴맛단맛을 어느 정도 경험해 본 어른들만이 애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깊이 있는 스토리’인 것이다. “스시걸” 1권은 총 여덟 명의 “스시걸”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첫 번째인 “전어씨”는 “간호사가 되고 싶었으나 ‘밤의 여왕’으로 살아가는 쓸쓸한 여성과 참한 전어 아가씨”의 이야기, 두 번째인 “오징어 양”은 “아이들을 싫어하는 까칠한 여교사와 교복을 입은 오징어 여고생”의 이야기, 세 번째인 “연어알파트라 님”은 “존재감 없는 왕따 소녀와 화려한 연어알 왕관을 쓴 이집트 풍 여왕님”의 이야기, 네 번째인 “붕장어 군단”은 “남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불량소녀와 코믹한 코스프레 붕장어 양 군단”의 이야기, 다섯 번째인 “새조개 씨”는 “사랑에 죽고 사는 단순한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 섬세한 새조개 아가씨”의 이야기, 여섯 번째인 “계란이”는 “가식과 내숭으로 살아온 아가씨와 천진난만 솔직한 달걀말이 꼬마 아가씨”의 이야기, 일곱 번째인 “농어 씨”는 “외로운 미식가 꼬마 아가씨와 장인의 애정이 담긴 상냥한 농어 아가씨”의 이야기, 여덟 번째인 “단새우 궁녀님”은 “슈퍼우먼 신드롬을 앓는 직장 여성과 여유를 즐길 줄 아는 단새우 궁녀님”의 이야기다. 이렇게 ‘초밥요정 1명과 인간 여자 1명의 조합’이 작품의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설정구조인데, 이 독특한 판타지가 작가의 따뜻하고 섬세한 스토리 전개능력과 맞물려 어디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미묘하고 애잔한 느낌을 전해준다. 소설이나 영화로는 전달할 수 없는, 만화만이 만들어내는 신기하고 생경한 경험이라고 표현하면 맞을 것 같다.(여운을 남기는 연출도 끝내준다) “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걸까? 웃으며 지내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뭐야 그게, 뭐야 그게...결국 끝까지 함께 해줬구나. 5년이었나?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는데 왠지 즐거웠던 건 어째서일까....비쩍 마른 시체 옆에 굴러다니던 바싹 마른 초밥 한 접시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작품에 반한 사람으로서 ‘한줄 평’을 하자면, ‘인생의 외로움과 퍽퍽함을 잊게 해주는 좋은 친구 같은, 불가사의한 어떤 존재를 만난 느낌’이라고 쓰겠다.(별점 5개 만점!) 이 책을 읽으며 때론 감동하고, 때론 웃고, 때론 울고, 때론 공감했던 것은 아마 나도 외롭고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독특한 판타지를 통해 인생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작품이다. 다음 권이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강력하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