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나는 먼저 뒷산에 올라가봤다. 여기서는 온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이 동굴에 귀신이 숨어 살면서 민가로 내려와 사람들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어릴 적 숨바꼭질을 하면서 여기에 숨은 적이 있다. ‘귀신동굴’에 숨으면 신기하게도 술래가 절대 찾지 못하는 것이었...
2013-01-09
김현우
“나는 먼저 뒷산에 올라가봤다. 여기서는 온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이 동굴에 귀신이 숨어 살면서 민가로 내려와 사람들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어릴 적 숨바꼭질을 하면서 여기에 숨은 적이 있다. ‘귀신동굴’에 숨으면 신기하게도 술래가 절대 찾지 못하는 것이었다. 숲은 바뀐 것 하나 없이 옛날 그대로였다. 그 낡아빠진 신사도...” 『“남은 일생동안 오타쿠 교육을 하면 죽을 무렵에는 훌륭한 오타쿠의 아내가 되겠지. 우선 모로호시 다이지로를 독파!” -안노 모요코 “감독 不적격” 속 안노 히데아키의 대사.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단편 “그림자의 거리”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이토록 창작자들에게까지 많은 영감을 제공한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1949년 생으로 1970년 테즈카 오사무가 창간한 잡지 ‘COM’에서 단편 “준코, 공갈”로 데뷔하였으나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1974년 ‘소년 점프’에서 주최한 신인만화가 공모전에서 단편 “생물도시”로 제 7회 테즈카 상을 수상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암흑신화”, “공자암흑전”, “머드맨” 등의 걸출한 장편과 많은 단편들을 통해 그의 유래 없이 독특하고 창의적인 작풍은 더 깊고 풍부해졌으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독자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기묘하고 그로테스크한 설정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모호한 결말, 그리고 그 사이를 이어주는 부조리하고 괴이쩍은 이야기 전개’,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이 말들만으로도 독자들의 마음은 벌써 설레이기 시작할 것이다.』- 책 표지의 소개글에서 인용 “나는 발이 빨라 술래한테 절대 잡히지 않는 걸 득의양양하게 여겼다. 정겹게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에 향수를 느낀 나는 아이들 틈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신나게 뛰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숨을 몰아쉬며 숲속을 달리고 있었다. 불현듯 알 수 없는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달아나야 해...날...잡으러 쫓아온다....” 일본에서 ‘오타쿠의 교본’으로 여겨지는 일본 만화가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작품들이 요 근래 몇 년간 한국에 많이 소개되었다. 정식 한국어판으로 소개된 작품만 해도 대표작으로 불리는 “암흑신화”, “공자암흑전”, “머드맨”, “서유요원전” 등의 장편들과 “사가판 어류도감”, “사가판 조류도감”,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기묘한 이야기”,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진귀한 이야기”, “스노우 화이트-기묘한 그림동화”, “무면목/태공망전”,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등 단편집들이 있다. 오래 전에 소개된(아마도 해적판으로 보이지만^^) “서유요원전 화과산 편”, “평장산 편”, “오행산 편”과 시공사를 통해 발행된 “시오리와 시미코”시리즈, “제괴지이”시리즈도 있으나 절판 등의 이유로 구하기가 매우 힘들다. 여기에 소개하는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단편집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한국어판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모태가 되었다 해서(정확히 얘기하면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창작의 영감을 받았다고 해서) 엄청나게 유명해진 단편 “그림자의 거리”를 포함, 총 10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 단편집이다. “그날부터 나의 기이하고도 무시무시한 체험이 시작됐다. 그곳은 작은 마을 같았다. 그리고 아직 내 정신이 온전하다면 여긴 우리 마을 뒤 ‘진수의 숲’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신사도, 사람들도 나는 알지 못했다. 게다가 사람들의 복장은 터무니없이 시대착오적이었다.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 신사 신주와 무녀처럼 생긴 여자 뿐, 그나마도 식사때나 상태를 살피러 올 때뿐이었다. 그때부터였어...그때부터 뭔가 잘못된 거야...” 올 컬러로 실려 있는 첫 번째 단편 “방주가 오던 날”과 두 번째 단편 “난파선”은 매우 짧은 분량의 가벼운 이야기로 ‘메인디쉬 전의 에피타이저 같은’ 느낌의 작품이고, 세 번째 단편 “진수의 숲”부터 모로호시 다이지로다운 기묘한 이야기들이 제대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진수의 숲”은 어릴 적 살던 동네를 산책하던 한 남자가 시간의 틈새에 빠져 끔찍하고 괴이한 일을 당한다는 기묘한 이야기로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 지는 특이한 결말 때문에 다 읽고 나면 묘한 뒷맛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예전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예로부터 전해지는 동화나 애들 놀이에는 오래된 종교행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고...‘카고메카고메’, ‘즈이즈이즛코로바시’, 그리고 ‘술래잡기’와 ‘숨바꼭질’ 역시...! 매년 마을에서 한 명씩 술래가 뽑힌다. 그 술래는 이듬 해 마을 사람 중 한 명을 다음 술래로 뽑는다. 다들 이를 피해 달아나지만 결국 누군가가 붙잡힌다. 그 뒤 먼젓번 술래는...죽임을 당한다! 나는 인신공양의 산제물이야! 여기 이대로 있다간 죽을 거야!” 네 번째 단편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다. 초능력과 UFO를 믿는 초등학생 후리오와 그의 유일한 친구 지로가 엮어내는 아련하면서도 기이한 이야기인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차원우주개념 같은 난해한 과학적 소재를 초등학생들의 일상과 절묘하게 융합해 매우 특이한 느낌의 이야기로 뽑아낸다. 다섯 번째 단편은 “연못의 아이”로 인디오들의 ‘두엔데’ 전설을 소재로 한 환상기담이다. ‘두엔데’란 인디오 말로 인간이나 동물로 둔갑해 사람을 잡아먹는 요물이라는 뜻으로 차크타 연못에서 발견된 남녀 한 쌍의 아이들을 등장시켜 기묘한 이야기를 엮어간다. 여섯 번째 단편 “유사(流砂)”는 절벽과 사막으로 둘러싸여 마치 감옥 같은 작은 마을을 탈출하려는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씁쓸한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작품이다. 일곱 번째 단편 “쿠로이시지마 살인사건”은 외딴 섬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젊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벌어지는 매우 철학적인 이야기로 ‘인식과 현상, 실체와 개념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읽는 이에게 던지는 작품이다. 여덟 번째 단편 “성”과 아홉 번째 단편 “파란 무리”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집에서 가장 훌륭한 드라마 구조와 문학적인 완결성을 갖춘 단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부조리(不條理)와 실존(實存)’에 관한 작가의 심오한 철학적 사유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열 번째 단편 “그림자의 거리”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앞서 언급한대로 “신세기 에반게리온” 때문에 워낙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직접 보시는 편이 글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느낌을 받을 거라 여겨진다.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정수(精髓)’를 맛볼 수 있는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는 소장가치가 분명히 있는 책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단점도 있지만, 각각의 단편 속에 담겨있는 철학적인 심오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