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에서도 만화가 (쿠바편)
“여러분, 안녕하세요. 세계를 이리저리 떠돌며 사는 유목민형 만화가 야마자키 마리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내가 애용하는 슈트케이스는 굉장히 낡았다...이 슈트케이스가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나오면 옆에서 자기 가방을 기다리던 사람들 얼굴이...기괴한 표정으로 바뀐다. 그런 ...
2012-11-28
석재정
“여러분, 안녕하세요. 세계를 이리저리 떠돌며 사는 유목민형 만화가 야마자키 마리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내가 애용하는 슈트케이스는 굉장히 낡았다...이 슈트케이스가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나오면 옆에서 자기 가방을 기다리던 사람들 얼굴이...기괴한 표정으로 바뀐다. 그런 슈트케이스의 모습이 여행에 대한 내 자세를 대변한다고나 할까...즉, 나는 여행을 간다고 가슴이 부푸는 타입이 아니다. 나의 여행은 항상 고생으로 점철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왜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 “테르마이 로마이”라는 작품으로 일본만화계를 들썩이게 했던 독특한 이력의 작가 야마자키 마리가 본인의 여행담을 담은 재미있는 만화 “세상의 끝에서도 만화가”가 한국어판으로 정식 출간되었다. 현재(2012.10) 한국어판으로는 2권까지 출간되었는데 1권은 ‘쿠바 편’, 2권은 ‘이집트, 시리아 편’이다. “하지만, 그렇게 안 되는걸, 내안의 카네타카 카오루가 무조건 떠나라고 말하는걸!!” 야마자키 마리는 ‘만화가’라는 정(靜)적인 특성의 직업에 비해 굉장히 동(動)적인 생활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만화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피폐해진 얼굴로 마감에 시달리며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그리고 있는 그런 모습이 대부분이고, 실제로도 어딘가의 매체에 연재를 하고 있는 만화가라면 거의가 다 그렇게 산다. 움직이기 보다는 가만히 자리 잡고 앉아서 자신이 구상한 상상의 나라를 지면위에 옮기는 직업이 만화가일진데, 야마자키 마리는 그렇지 않은 사람인 것 같다. “카네타카 카오루는 과거 세계기행 TV프로의 리포터 & 디렉터를 겸했던 저널리스트로 그녀가 방문한 나라는 무려 150개국 이상! 난 어릴 적부터 이 분의 TV프로를 좋아했다. ‘80일간의 세계일주’의 꿈으로 가득한 테마곡을 배경으로 TV화면에는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는 팬 아메리칸 월드항공(오래전에 파산), 자유롭게 세계각지를 찾아가...자유롭게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교류하는 카네타카 카오루...사방팔방 못가는 곳이 없는 카네타카 카오루, 어릴 적 내가 동경했던 인물들에게는 어떤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그들은...모두 단독여행을 하는 사람들이다.” 야마자키 마리라는 작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책표지에 실린 그녀의 프로필을 잠시 소개하자면, 『1967년 4월 도쿄출신, 14세 때 독일과 프랑스를 홀로 여행하면서 알게 된 이탈리아인 도예가의 초청을 받고 17세 때 이탈리아로 건너가 11년간 머무르면서 미술을 공부한다. 유화를 전공하다가 미술사 쪽으로 전공을 바꾸고, 그림 복원이나 초상화 그리기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유학생활을 하던 중 친구의 권유를 받고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생활을 그린 에세이 만화로 1996년에 데뷔, 14세 때 만난 이탈리아 도예가의 손자와 결혼하여, 중동, 이탈리아, 포르투칼에서 살았으며, 현재는 남편의 부임지인 시카고에서 살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지구연애”, “세상의 끝에서도 만화가”, “맹렬! 이탈리아 가족”, “테르마이 로마이”, “이탈리아 가족 풍림화산”, “PIL”이 있다.』 “그리고 당시 내가 좋아했던 라디오 방송이 죠 타츠야가 진행하는 제트 스트림(JET STREAM), BGM은 고독한 영혼을 울리는 ‘미스터 론리’, 방송을 들으며 부풀어 오르는 나의 상상력, 그런 상상 속에서 홀로 여행하는 나...지금도 ‘제트 스트림’의 테마곡을 들으면 마음이 들뜬다. 카네타카 카오루의 ‘세계의 여행’과 죠 타츠야의 ‘제트 스트림’ 이 두 방송이 나를 ‘이동형’ 인간으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확신한다. 거기다가 내가 유소년기를 보낸 홋카이도의 하늘에는 항상 비행기나 철새가 날아다녀서 나의 ‘이동심리’에 박차를 가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그간 야마자키 마리가 보여주었던 ‘극화’의 형식이 아닌 일종의 에세이집 같은 여행기다. “테르마이 로마이”나 “지구연애” 같은 야마자키 마리만의 ‘독특한 감수성’이 담긴 장편극화를 원하는 분이라면 이 책에 별로 호감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야마자키 마리라는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이 책을 통해 그녀의 독특한 감수성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녀만의 활발한 상상력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여행지로 소개되는 쿠바나 시리아, 이집트에 대한 유용한 정보도 함께 만끽할 수 있다.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 살아도 그 곳에 길게 안주할 수 없는 컨트롤 불가능한 나의 성질...만약 인간을 크게 두 가지 타입으로 나눈다면 나는 틀림없이 유목민족형일 것이다. 이 유목민족적인 성질은 결코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1970년대 초 엄마는 모험소설을 좋아했다. 엄마가 권한 책 대부분이 거주형이라고 여기긴 힘든 등장인물만 나와서 읽다 보면 저절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그러다 실제로 가족 중에 있다면 골치 아플 방랑벽이 있는 인물에게 홀딱 반해서는...‘엄마, 나...그림을 그리면서 여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림을 그리며 여기저기 방랑하는 사람이 될래.’ 그렇다...그때 나의 장래희망은, ‘떠돌이 화가’ 여자 판!” 이 책을 펼치면 첫 장부터 “나의 여행은 절대로 가슴 설레거나 로맨틱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경고의 문구부터 눈에 들어온다. 사실 여자의 몸으로 어릴 때부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외국을 홀로 돌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대단하고 희귀한 일 일수 있다. 프로필에도 나와 있고 책 본문에서도 간단히 소개되지만 야마자키 마리가 유럽 단독여행을 시작한 것은 14살 때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여행기에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풍경보다는 그곳에서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낯선 땅에서 별의별 고생을 다하며 얻은 값진 경험이,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한 아름답고 따뜻한 삶의 모습 한 조각이 담겨있다. “쿠바에 도착한 후론 매일 사탕수수 수확, 쉬는 시간에는 사탕수수밭 일꾼들의 얼굴을 그리다가 문득 자신이 과거에 꿈꾸던 대로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땅콩장수는 못 만났지만 어릴 적부터 동경했던 나라에 왔다는 감동은 각별했다.” 이 책의 1권에는 야마자키 마리의 초기작인 “SPLENDOR!”도 실려 있다. 미술품을 복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고단샤 ‘mimi’의 자매지 ‘kiss 카니발’이란 잡지에 실렸다고 한다. 2권에는 “다마스쿠스식 핸드폰”이라는 단편도 실려 있는데 친하게 지내는 작가들 몇 명이 모여서 만드는 “붉은 이”라는 동인지에 실었던 만화라고 한다. 진솔하고 소박한 세계여행기와 야마자키 마리의 초기작 단편을 만날 수 있는 “세상의 끝에서도 만화가”는 그녀의 팬들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