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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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신 작품집 SEASONS-여름 빛 속의

“그 여름빛 속에 분명히 있었던 소년과 소녀에게 바친다.” “최종병기 그녀”라는 작품으로 SF장르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일본 만화가 다카하시 신의 작품집 “여름빛 속의”가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SEASONS’라는 타이틀 아래 “여름빛 속의”라는 부제를 달...

2012-11-20 김진수
“그 여름빛 속에 분명히 있었던 소년과 소녀에게 바친다.” “최종병기 그녀”라는 작품으로 SF장르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일본 만화가 다카하시 신의 작품집 “여름빛 속의”가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SEASONS’라는 타이틀 아래 “여름빛 속의”라는 부제를 달고 한 권으로 묶인 이 책은 크게 두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여름빛 속의, 햇살과 눈부심과 콘트라스트 속에서, ‘우리’는 재회했다.” 다카하시 신의 작품세계는 난해하지도, 무겁지도 않다. 다만 작품을 통해 순수하고 아름다운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가끔씩 무겁고 슬픈 감정이 밀려오거나,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다카하시 신의 대표작인 “최종병기 그녀”에서도 이런 모순적인 감정은 극한으로 내달렸다. ‘사랑’을 하고 싶은 ‘최종병기’ 소녀와 그 소녀를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은 평범한 소년의 세기말적인 러브스토리는 수많은 독자들의 가슴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옳은 것과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들을 지켜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대가들, 그것이 세상의 악의(惡意)로 가득 찬 어떤 것이든, 위선적이고 위악적인 허세든 간에, 무언가를 얻으려면 무언가를 잃어야만 한다는 차갑고도 잔인한 진리를 다카하시 신은 그의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그래서 “슬프도록 아름다운”이라는 문장은 이런 다카하시 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하기에 가장 좋은 말인 것 같다. “10년 후 여름, 이 학교에 모이자.”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인 “여름빛 속의”란 단편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10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 동창생들이 그들이 예전에 함께 묻었던 타임캡슐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다카하시 신 특유의 색깔이 과도할 정도로 드러나는 작품인데, 이 작가는 확실히, ‘추억’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감성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반이 하나뿐이었는데도 최소한...왜...그 친구를 기억해주지 못한 걸까?” 첫 번째 이야기에서 사실 좀 ‘과도하다’라는 느낌을 받은 것은, 이야기의 구조가 무척이나 간단한데 비해 엄청나게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고, 결말부분의 감동을 배가시키기 위해 스토리를 배배 꼬아놓으려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물론, 10년 만에 재회한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어릴 때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비교해보면서 ‘잊고 있었던 소중한 그 무엇’을 되찾아가는 과정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려 노력하는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알겠으나, 불필요한 장면들이나 과도하게 넘쳐나는 대사들이 솔직히 좀 ‘거슬릴’ 정도로 많았다. “비버가 보낸 편지는 ‘아이’ 시절 이후 10년이 흘러 꿈을 잃거나 잃어가고 있는, 그런 우리에게 보내는 ‘부끄러운’ 메시지였다. 어렸던 그 시절,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그 시절의 우리가 보낸 메시지였다.” ‘꿈과 현실’이라는 영원한 테마를 ‘타임캡슐’이라는 소재를 통해 아름답고 쓸쓸하게 풀어낸 이 첫 번째 이야기는 다카하시 신의 또 다른 대표작 “좋은 사람”의 느낌과 많이 닮아있다. 은은하고 애틋한 ‘여름날의 추억’을 떠올려보고 싶은 분께는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소녀 시절, 언덕이 많은, 바다와 가까운 작은 마을에 살았던 적이 있다. 소녀 시절, 나는, 바보였다.” 두 번째 이야기인 “비밀기지”는 ‘소녀 편’과 ‘해후 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단편이라고 보기엔 분량이 상당해서 ‘연작 시리즈’라고 명명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어린 시절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었을, ‘비밀기지’에 대한 추억을 미스터리를 가미한 판타지로 풀어놓았다. “아빠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몸이 약해서 그 해 여름엔 아빠의 고향인 이 마을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난 건강하지 못한 아빠가 싫었다. 어린 시절부터 한 번도 제대로 놀아준 적은커녕 변변히 얘기조차 나눠보지 못한 것이다. 운동회나 학부형 참관일에 가끔 나타나는 기이한 생물이 친구들의 ‘아빠’라는 사실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하기까지는, 내 작은 머리로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몸이 아파 항상 누워만 있는 아빠와 그런 아빠를 간호하느라 지쳐버린 엄마,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귀찮아하는 친척 어른들, 어린 소녀는 자신을 둘러싼 이런 모든 지긋지긋한 상황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신비한 오빠를 만나고 그 오빠가 알려준 신비한 주문을 통해 영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멋진 서양식 주택 안의 비밀 정원으로 들어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소녀는 어딘가 아파보이는 신비한 느낌의 오빠와 함께 아름다운 비밀기지 안에서 추억을 만들어간다. “여긴 비밀의 정원이야, 네 것이 아니지, 그래도 들어가고 싶어? 그럼 정원의 주인한테 경의를 표해야지, 자신을 위해 중요한 소원을 들어준 사람에게 넌 뭐라고 말하지?” 소녀가 비밀의 정원에 들어가기 위해 오빠에게 받은 주문은 “고마워”, 단 한 마디였다. 이 한 마디의 주박 같은 주문은 이후 소녀의 인생 전반에 걸쳐 아주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하게 되고 이것은 뒤이어 진행될 ‘해후 편’에서도 핵심적인 단어가 된다. “잘 가. 난 이미...오빠의 등을 추월해버렸어.”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해 여름날의 추억에 흠뻑 빠져보고 싶은 분께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