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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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의 개

“자유 민권 운동이 과격화한 끝에 쇠퇴하고, 국회 개설과 헌법 발포를 바로 눈앞에 둔 메이지 20년대(1887년~1896년)초, 홋카이도는 한창 개발의 전기를 맞이하던 참이었다. 그 중에서도 미개발지였던 동부가 러시아의 확장에 대비한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시됨에 따라, ...

2012-11-18 김현우
“자유 민권 운동이 과격화한 끝에 쇠퇴하고, 국회 개설과 헌법 발포를 바로 눈앞에 둔 메이지 20년대(1887년~1896년)초, 홋카이도는 한창 개발의 전기를 맞이하던 참이었다. 그 중에서도 미개발지였던 동부가 러시아의 확장에 대비한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시됨에 따라, 일본 정부는 이곳에 군사적 목적을 위한 간선 도로를 놓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이시카리 도로와 아바시리 도로를 아우르는 홋카이도 중앙도로 건설이 바로 그것이었다. 공사는 시급을 요했다. 그 때문에 카바토, 소라치 등 중범죄자들을 수용하던 감옥에서 수많은 죄수들을 파견해 노역케 했다. 미개척지의 산야를 깎아 길을 닦는 공사는 실로 혹독한 것이었다.” “기동전사 건담(“퍼스트 건담”이라 불리는 첫 번째 TV시리즈에서는 작화감독으로 참여하였다.)”, “비너스 전기”, “바람과 나무의 시”, “아리온” 등 일본애니메이션 역사에 있어 굵직한 족적을 남긴 명작(名作)들을 만들어낸 애니메이터이자 연출가인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만화가로서도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바로 얼마 전에 한국어판으로도 완간된 “모빌슈트 건담 THE ORIGIN”(전 23권)을 비롯해, “무지갯빛 트로츠키”, “미카와 모노가타리”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1947년생이라는 적잖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통해 일본만화애니메이션 산업계에서 거장(巨匠)으로서의 위치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일찍이 그 한 몸 바쳐 조선의 국난(國難) 타개에 힘을 보태고, 나아가 우리 일본의 전제 정치를 깨부숴 민권 정치 실현의 반석이 되고자 했던 열사 일동을 수만 오사카 시민들은 환호 속에서 맞이하였다...우메다 정차장에서 시작된 그 기나긴 행렬의 의기는 하늘마저 움직일 만큼 드높았으며, 개선 장군 오오이 겐타로의 앞길에 입추(立錐)의 여지조차 없을 만큼 잔뜩 몰려든 군중이 입을 모아 만세를 외쳤다.” 이렇게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노익장(老益壯)을 과시하고 있는 거장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대표작 중 하나인 “왕도(王道)의 개(狗)”가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전 4권 완결) “왕도(王道)의 개(狗)”는, 2000년 제4회 문화청 미디어예술제 만화 부문 우수상 수상작이며 “무지갯빛 트로츠키”, “하늘의 혈맥”과 더불어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근대사 3부작’ 가운데 한 편으로, 메이지 유신이 끝난 후 근대화, 산업화의 길에 매진하던 일본이 왜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제국주의의 길을 택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하는 일련의 역사를 한 젊은이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펼쳐낸 수작(秀作)이다. 홋카이도 개척,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등 일본, 중국, 조선을 아우르며 동시대에 벌어진 동북아시아의 격동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동양의 정치사상 중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의 대립을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한 젊은이의 삶의 궤적을 통해 우회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라 하겠다. “삿초 파벌이 실세를 쥔 작금의 정부가 어진 정치를 펴지 않는다면, 한 사람, 한사람 자기 자신의 힘을 의지해서라도 살아가야만 해,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데에 아쉬움이 없도록 함이 곧 왕도(王道)의 시작일지니’, 백성들의 삶을 편안히 하여 먹고 살 걱정도, 죽어 묻힐 걱정도 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것이 왕도를 걷는 정치의 시작이지, 이를 위해 지나친 벌목을 삼갈 것, 물고기 남획을 삼갈 것 등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노라고 맹자는 말했지만, 아이누 인들 같은 경우, 원래부터 그런 지혜를 타고났다네, 배우기는 오히려 그동안 분명 맹자를 계속 읽어왔을 터인 우리 일본인들이 배워야 해, 맹자를 읽었으니 마땅히 왕도에 의거하여 덕으로 다스리고 인을 행하며 의를 보여야 할 것인데, 정작 일본인들 중에는 온통 덕도 없고 인의도 모르는 자들밖에 없지 않나! 이래서야 아이누 인들이 일본인들의 지배를 반기지 않고, 내지에서도 소란의 불씨가 꺼질 줄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왕도(王道)의 개(狗)”의 주인공인 카노 슈스케는 어린 시절부터 ‘왕도(王道)’를 배우고 실천하기위해 심신을 단련해온 심지 곧은 청년으로, 지주들의 간악한 수탈에 맞서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던 농민무장봉기 사건에 참여했다가 ‘무장 강도’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중범죄자가 되어 홋카이도 개척 노역에 보내진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에 성공하지만 죄수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을 구해준 아이누인 포수와 동행하며 아이누인 행세를 하다가 당대의 무술 명인 소가쿠를 만나 제자로 들어간 후부터 그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소가쿠 선생님, 청이 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일반 세상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입니다. 남들이 걷는 밝은 길도 걸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두운 길이라도 좋으니 저는 천하의 왕도를 걷고 싶습니다! 왕도를 지키는 개가! 강한 개가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빕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유술을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왕도(王道)의 개(狗)”가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에게도 의미가 있는 작품인 이유는, 조선 말기의 역사적 상황이 작품 내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카노에게 평생의 ‘정신적 스승’으로 자리하는 이가 바로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이며, 김옥균이 암살당한 이후 복수를 다짐한 카노는 동학농민운동과 조우해 ‘녹두장군’ 전봉준을 만나 향후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인생의 화두처럼 제시받게 된다. 작가인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작품의 후기에서 “나는 일본이 길을 잘못 든 것은 청일전쟁 때였다고 본다. 청나라는 쇠락했을지언정 아시아의 대국으로, 이제 막 근대 국가로서 발돋움하고자 하던 일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이를 언제 걷어차 버릴지, 메이지 시대 위정자들은 그 타이밍을 놓고 심사숙고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가 계획을 짜고 이토 히로부미 내각이 실행에 옮긴 행동이 바로 청일전쟁이었다. 청일전쟁은 온 국민이 지지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는 철저하게 의도적인 전쟁, 그리고 일본 쪽에서 벌인 더러운 전쟁이기도 했다. 메이지 덴노는 이와 관련하여 ‘이 전쟁은 짐의 전쟁이 아니다’라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무츠를 혐오했다. 그리고 이 전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각한 몇 안 되는 반전론자 중 한 명이 바로 카츠 카이슈였다. 여기서 나는 역사의 갈림길과 그 도표를 보았다. 왕도를 가리키는 화살표 쪽에 카츠를, 패도 쪽에 무츠를 세워둔 것은 내 아이디어였다.”라고 밝히고 있으며, 이것이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의 기둥이다. 왜 일본이 조선을 사이에 두고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켰고, 명성황후는 어째서 일본인들에게 암살당했으며, 후에 러일전쟁, 조선병합, 만주사변,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패도(覇道)’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그 “시발점”을 짚어주는 작품인 것이다. 일본인 작가의 눈으로 본 동북아의 근대사가 아주 흥미롭고 의미가 깊다.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