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뉴어스 라이프
“실론 공공도서관의 기원은 천 년 이상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또한 그 미궁과도 같은 지하 폐가제(閉架, 서고를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일정한 절차에 따라 책을 빌려주는 방식) 서고의 전모를 파악하는 일은 이제 불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스트레뉴어스(str...
2012-11-12
김진수
“실론 공공도서관의 기원은 천 년 이상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또한 그 미궁과도 같은 지하 폐가제(閉架, 서고를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일정한 절차에 따라 책을 빌려주는 방식) 서고의 전모를 파악하는 일은 이제 불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스트레뉴어스(strenuous) : 형용사 adj. 1.(사람, 지력 등이) 왕성한, 정력적인, 의욕적인, 열심히 분투노력하는, (활동, 노력 등이) 격렬한 2. (일 등이) 큰 노력을 필요로 하는, 힘이 많이 드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낯선 이름의 작가 마루야마 카오루는 저자 소개글에 따르면, 주로 소설이나 게임, 애니메이션의 일러스트를 담당하며 활약 중인 전문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한다. 여기에 소개하는 마루야마 카오루의 첫 단행본 “스트레뉴어스 라이프”는 엔터브레인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fellows!”에서 연재했던 옴니버스식 연작단편을 한데 모은 것으로 각종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24편의 단편을 수록한 책이다. 한국어판은 대원씨아이를 통해 출간되었다. “내 코끼리는 이 세상 마지막 코끼리다. 따라서 나는 이 세상 마지막 코끼리 조련사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코끼리를 씻긴다. 아침을 먹은 후 나와 코끼리는 거리로 영업을 나간다. 고객은 주로 중요한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린 사람. 매력적인 연애편지를 쓰지 못해 고심하고 있는 젊은이. 좀처럼 글이 나오지 않는 삼류 소설가 등이다. 대부분 상상력과 관계된 일로, 코끼리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다. 상상력의 ‘상(像)’은 코끼리의 ‘상(象)’이기 때문이다.(이건 정말이다.) 밤이 되면 나와 코끼리는 함께 잠을 잔다.” 이 단편집이 흥미로운 건 책 자체의 콘셉트 때문이다. ‘직업’을 테마로 한 24개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하는 ‘직업’이란, ‘세계 최후의 코끼리 조련사’, ‘지하미궁 도서관의 사서’, ‘기계장치를 잘 다루는 마녀’, ‘거대한 양을 기르는 전설의 양치기’, ‘1년에 한 번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왕국의 기억을 기록하는 공주’, ‘개의 얼굴을 한 치과 선생님’, ‘눈(雪)을 만드는 공장직원’ 등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는 있을 리 없는 신기한 직업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꿈을 꿨다. 코끼리야! 너 어디가?...‘계약기간은 끝났다. 나는 다음 장소로 간다’...나는 계약한 기억이 없는데...‘계약은 네 할아버지와 했다’...그렇구나...잘 지내, 코끼리야....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코끼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쯤 다른 누군가가 이 세상 마지막 코끼리 조련사가 됐을까. 졸지에 실업자가 된 나는 이 세상 마지막 코뿔소 조련사가 되기 위해 직업 훈련을 받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직업’ 자체가 기묘하고 신기한 일밖에 없기에 판타지, 액션, 드라마, 누아르, 콩트 등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전문 일러스트레이터인 작가의 멋진 작화솜씨 덕분에 독자들은 다양한 재미를 맛볼 수 있다. 한 에피소드가 차지하는 분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질릴 틈도 없다. (사실 너무 짧아서 아쉬운 에피소드가 꽤 많다) “우리 할아버지는 양치기입니다. 그것도 보통 양치기가 아니라 전국에 6명밖에 없는 국가 1급 양치기입니다. 할아버지의 양털은 품질이 매우 좋아서 몇 차례나 훌륭한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재작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스트레뉴어스 라이프”는 일종의 ‘환상동화’라고 보면 된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연상되는 아주 깔끔하고 잔잔한 느낌의 ‘예쁜 책’이다. 느낌 좋은 그림과 기묘하고 신기한 이야기가 만나 마치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신기한 나라에 대한 동화처럼 다가온다. “지금은 망하여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왕국, 그 왕국은 1년에 한 번, 달이 가장 환히 빛나는 날 밤에 희미하게 잠에서 깨어나 그 기억을 속삭인다. 그 속삭임을 건져 올려 정사로 기록해 남기는 것이 지금은 망해버린 왕국에서 유일하게 남겨진 공주의 역할이다.” 사실 이런 작품집은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워낙에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리는 책이라서 추천하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하지만 책 자체로만 보면 아주 알차고 독특한 구성이라서 소장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이다. 누군가의 기묘한 상상력을 멋진 그림으로 구체화시키고 문장으로 다듬어서 여운이 남는 한 편의 이야기로 완결시킨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오늘 새벽부터 관동지방에 파란색 눈이 내렸습니다만, 여전히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기상청에서는 앞으로의 대응을...” “스트레뉴어스 라이프”는 250페이지가 조금 넘는, 일반 만화책에 비해 조금은 두꺼운 분량에 총 스물 네 개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쭉 읽어내려 가면서 나에게 인상 깊게 남은 에피소드들은 “마지막 코끼리 조련사”, “성미 고약한 양치기”, “포장마차 공주”, “공장의 나날”, “이누이 치과”, “호문클루스”, “동력소녀”, “백만 마리 코끼리의 나라”, “세이렌” 정도였다. “랑아랑(浪牙狼)은 천 년 동안 운산의 영기와 해와 달의 정화(精華)를 몸에 받아 신통력을 얻은 승냥이와 이리의 정령이다. 허나 무한한 영력으로 온갖 방종과 포악한 짓을 저지르고 다니자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운산의 산신령이 신통력을 빼앗고, 강제로 ‘오쿠리 오카미’의 소임을 맡겼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생각은 몇몇 에피소드들은 따로 빼내서 장편으로 기획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전설의 왕국이 1년에 한 번 ‘옛 기억’을 속삭일 때 그것을 기록하는 소임을 맡은 공주의 이야기를 담은 “포장마차 공주”라거나, 사람들이 잃어버린 기억을 건져 올리거나 상상력을 자극해서 곤란한 일을 해결해주는 코끼리와 그 조련사의 이야기를 담은 “마지막 코끼리 조련사” 같은 에피소드는 장편으로 기획해도 무척 좋을 것 같았다. “실론 공공도서관은 내일도 여러분이 찾아주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동화책 같은 만화책’이었다. 아이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