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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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드

“『잘 살자 - 4학년 2반 아오키 카오루』, 천국에 계신 아빠, 초등학교 때 쓴 글의 의미를 26년 동안 살아온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서플리”, “시부야 마루야마 거리” 등의 작품이 한국어판으로 소개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얻은 일본의 순정만화가 오카자...

2012-11-06 김현우
“『잘 살자 - 4학년 2반 아오키 카오루』, 천국에 계신 아빠, 초등학교 때 쓴 글의 의미를 26년 동안 살아온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서플리”, “시부야 마루야마 거리” 등의 작품이 한국어판으로 소개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얻은 일본의 순정만화가 오카자키 마리의 신작 “앤드(&)”가 출간되었다. 현재(2012.09) 한국어판으로 2권까지 나와 있는 “앤드(&)”는, 각자가 가진 내면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진정한 관계’를 만들기 두려워하는 26살의 여자와 45세의 남자가 서로를 천천히 깊이 있게 알아가게 되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정말 원하는 것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의 주인공인 아오키 카오루는 병원에서 메디컬 클러크(medical clerk: 의료사무직의 일종)로 일하는 파견사원(우리나라로 치면 비정규직 사원)으로 스물여섯이 될 때까지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해본 아가씨다. 사실 연애를 못해봤다는 표현보다는 안해봤다는 표현이 더 맞을 텐데, 이는 어린 시절 화재 사고로 인해 아버지를 잃은 후부터 카오루의 마음속에 생긴 트라우마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닿는 게 싫다’는 감정은 주위의 사람들, 특히 남자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마음속에 벽을 쌓게 만들었고, 그것이 삶속에서 서서히 굳어져가면서 어느새 습관처럼 카오루의 심신에 새겨져 버린 것이다. 그런 독특한 사정이 있는 카오루지만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욕구는 날로 커져서, 속으로는 ‘일 때문이라면 타인과 닿을 수 있으니까요’라는 이유로, 겉으로는 ‘파견사원의 불안한 미래 때문’이라는 경제적인 이유로, 회사근무가 끝난 후 밤 시간의 부업으로 네일샵을 개업한다. “언제나 이렇게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뭔가를 포기해 간다.” 이런 여자 주인공 앞에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난다. 한 명은 카오루가 일하는 병원에서 심술쟁이 영감이라 불리는 괴짜 의사 야가이 오가다. 항상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괴팍하고 날카로운 성격의 45살의 남자로 전공은 폐(肺)외과의, 독설가에 사람을 싫어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의사로서의 실력은 매우 뛰어나다.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난, 다른 사람과 몸이 닿는 게 싫어요.” 또 다른 남자는 카오루의 대학 동아리 후배이자 업계에서 ‘카리스마 프로그래머’라 불리는 시로타 타케시다. ‘그가 못 고치면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프로그래머인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팀 고릴라’라는 벤처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시로타는 대학 때 실수로 들어간 동아리에서 우연히 만난 카오루를 짝사랑하기 시작했으며 그녀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조심해서 그녀 곁을 맴돌다 드디어 가까워지는 기회를 포착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카오루의 투잡 덕분이었다. ‘밤에만 쓰고 싶다’는 조건 때문에 네일샵의 가게 자리를 구하지 못해 난감해하던 카오루에게 우연을 가장하고 접근한 시로타는 고층건물들이 즐비한 중심가에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아담한 전통가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사무실을 보여주고 평상시 쓰지 않는 1층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일에 있어서만큼은 최강의 카리스마와 천재적인 실력을 자랑하는 시로타지만 자신이 짝사랑하는 카오루 앞에서는 순진무구한 숙맥이 되어 부끄럼만 타게 되는 사춘기 소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PC가 자꾸 멈춰버리는 현상을 말하는 거야. 재기동해도 재기동해도 자꾸 멈춰버리지. 그걸 ‘멈춤 현상’이라고 해. 꼭 당신 같지 않아? 자꾸 멈추기만 하는 멈춤 현상” 앞선 작품들에서도 ‘일과 사랑’을 주제로 직장여성들의 다양하고 복잡한 심리묘사와 그 속에 감춰진 내밀한 욕망을 감각적으로 풀어내 독자들로부터 많은 공감과 호응을 얻었던 작가 오카자키 마리인 만큼, “앤드(&)”에서도 자신의 주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특히 남에게 속을 보이기 싫어 다른 이와의 접촉을 회피하던 카오루가 처음으로 ‘그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 중년의 외과의 야가이의 과거에 대한 묘사가 매우 탁월하다. 의사로서 희망과 자부심, 절망과 비참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 ‘부조리한 어느 사건’을 긴 지면을 할애해가면서 자세히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카오루와 같은 마음, 같은 시선으로 야가이를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어가는 과정은 작가의 관록이 여실히 느껴지는 부분이라 하겠다. “인간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돈이 드는 법이거든, 빨리 회수하시지 그래.” “앤드(&)”의 장점은 날카로운 비수 같은 감각적인 대사에 있다. 작가가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독자들에게 내뱉는 사랑에 관한 정의, 관계에 대한 진실, 사회에 대한 묘사, 구조에 대한 통찰 등등 ‘무시하고 싶을 정도로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을 오카자키 마리만이 구사할 수 있는 화법으로 담백하고 차갑게 대사로 담아낸다. 그래서 천천히 작품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문득 책장 넘기는 것을 멈추고 눈에 박힌 대사 한 마디를 오랫동안 곱씹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곤 하는데, 이것이 전혀 이질적이지 않고 작품의 상황과 스토리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어 감탄할 때가 많다. “안을 들여다본 그날, 함정에 빠졌다. 내 키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이의 함정에.” 부조리에 빠져 누구와도 얽히고 싶어 하지 않는 중년의 외과의와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연애 한번 못해본 스물여섯 여자가 서서히 사랑에 빠져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낸 “앤드(&)”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무리한 설정들이 가끔씩 돌출되긴 하지만 ‘한국식 막장드라마’에 질린 독자들이 있다면 꼭 권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누군가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감정이야말로 ‘사랑’의 시작이고 ‘진정한 관계’로 가는 출발점이다. “관계를 맺는다는 건, 길들인다는 뜻이야”라는 어린 왕자와 여우의 이야기처럼 서로를 향한 호기심에서 출발해 서로를 간절히 탐닉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천천히, 깊이 있게 그려낸 수작(秀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