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나무
“할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저 산 너머에는 좋은 것들이 가득하단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고개에 있는 성에는 무서운 여왕이 산단다.’ 우리 아버진 마을의 유일한 중개인이자 마을에서 오직 한 명, 산 너머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백귀야행”이란 ...
2012-10-26
김진수
“할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저 산 너머에는 좋은 것들이 가득하단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고개에 있는 성에는 무서운 여왕이 산단다.’ 우리 아버진 마을의 유일한 중개인이자 마을에서 오직 한 명, 산 너머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백귀야행”이란 작품으로 ‘환상기담(幻想奇談)’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일본 만화가 이마 이치코의 신작 단편집 “여행자의 나무”가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이마 이치코의 작품 특징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 세계를 ‘그럴듯하게’ 독자들에게 인식시켜주는 ‘자연스러움’에 있으며, 천천히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세계에 빠져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설정의 유려함’이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애들한테 그러지 말란다고 말을 듣겠어? 원래 애들은 아주 사소한 차이도 놓치지 않는 법이야. 저 녀석들도 농장에서 일을 돕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자신들이 딴 과일을 하나라도 더 팔기위해선 수이네 아버지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는 걸.” “여행자의 나무”는, 서로 연관성이 있는 다섯 개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단편집이다. 첫 번째 단편 “고개 성의 차가운 여왕”은, 사막의 한 가운데에 있는 커더란 오아시스 주변에 생성된 작은 마을을 무대로 펼쳐지는 기이한 이야기로, 마을의 유일한 중개인인 아버지가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자 아무런 경험도 없이 중개인으로 나서게 된 소년 수이가 겪게 되는 신비한 여정을 흥미진진한 미스터리처럼 풀어낸 작품이다. “보이는 건 온통 사막뿐...그 속에 덩그마니 자리한 우리 마을은 샘이 다섯 개나 있는 큰 오아시스입니다. 과일도, 곡물도 풍요로워서 마을 사람들이 생활하기엔 충분하죠. 하지만 마을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 예를 들면 소금이나 금붙이나 진귀한 세공물 같은 건 산 너머에 가서 구해 와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소금은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물건이에요. 그 때문에 중개인인 아버지는 매달 길고 험난한 길을 떠나 마을의 과일과 곡물을 다른 물건과 교환해 오는 것입니다.” 이 단편집에서 이마 이치코가 스토리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쓰는 설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사막 한 가운데에 고립된 마을이라는 점, 또 하나는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과 어울려 공생하고 있는 ‘귀인(鬼人)’이라는 이형(異形)의 존재들이다. 첫 번째 단편인 “고개 성의 차가운 여왕”부터 “죄인의 언덕”, “잠깐의 휴식”, “여행자의 나무”, “여행자의 신발”로 이어지는 이 ‘사막’과 ‘귀인’의 세계는, 이마 이치코가 창조해낸 신비롭고 기이한 세계로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이런 강제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애잔하고 흥미롭게 그려내는 것이 이 책의 포인트라 할 수 있다. 다섯 편의 단편들은 각각 다른 인물들과 다른 마을들을 배경으로 각자의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앞서 얘기한 공통적인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조금씩 연결되어 있는 구조다. 천천히 읽어가다 보면 왜 이마 이치코가 “환상기담” 분야에서 새로운 영역의 창시자로 불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