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텅 빈 바둑판은 요염하게 빛나고 그 위로 폭풍전야의 정적이 흐른다. 외나무다리에 선 승부사들은 묻곤 했다. 그곳 망망대해의 어디에 나의 삶이 존재하는가. 이제 나는 칼을 품고 대해로 나가려 한다. 나는 과연 살아 돌아올 수 있는가. 두 적수는 무심한 눈빛으로 판을 응...
2012-10-23
석재정
“텅 빈 바둑판은 요염하게 빛나고 그 위로 폭풍전야의 정적이 흐른다. 외나무다리에 선 승부사들은 묻곤 했다. 그곳 망망대해의 어디에 나의 삶이 존재하는가. 이제 나는 칼을 품고 대해로 나가려 한다. 나는 과연 살아 돌아올 수 있는가. 두 적수는 무심한 눈빛으로 판을 응시한다.” “야후”, “이끼”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한국만화계를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선 윤태호의 신작 “미생”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미디어다음 만화 속 세상에서 매주 화요일, 금요일 주 2회로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는 웹툰 “미생”은, 샐러리맨들의 일상을 리얼하게 그려내면서 많은 독자들의 열띤 공감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미생(未生)”이란, 바둑에서 쓰는 용어로서 두 집을 확정짓지 못해 아직 완벽하게 살아있지 못한 상태의 바둑돌들을 뜻하는 단어다. 윤태호의 “미생”은, 프로기사를 꿈꾸며 어린 시절부터 바둑에만 매진했으나 결국 프로가 되지 못한 바둑영재 장그래를 주인공으로 삼아 대기업 종합상사를 무대로 샐러리맨들의 일상을 리얼하고 드라마틱하게 펼쳐낸다. “처음부터 시작할 겁니다. 남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했던 방식으로 들어갈 겁니다. 낯설고 힘들겠지만 원하는 대로 할 겁니다. 다시는...바둑처럼 실패하지...않겠습니다. 제가 밝혀야 할 불빛들이 있다면 책임질 겁니다. 내게 허락된....불빛이 있다면요.” 어린 시절부터 기재를 인정받아 한국기원 연구생까지 됐지만 입단에 실패하여 바둑의 길을 포기해야했던 장그래는, 군대를 다녀온 뒤 돌봐주시던 사범님의 소개로 ‘원 인터내셔널’이라는 종합상사에 인턴사원으로 입사한다. 고졸 학력도 검정고시로 취득한 장그래에게 ‘샐러리맨’의 삶이란, 모르는 것투성이에 마주치는 누구에게나 주눅 들어 버리는 최악의 전쟁터다. 그러나 좋은 선배들과 직속 상사, 입사동기들 등 주위 사람들의 도움도 받고, 바둑을 통해 단련된 자신만의 번뜩이는 재치를 무기삼아 눈앞에 닥친 고난을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마침내 정사원 채용시험에 합격, 본격적인 샐러리맨으로서의 인생을 걸어 나가게 된다. “출근 첫날이 저물어간다...언제나 그랬지. 오늘의 대국을 다시 복기하며...수많은 패배를 마주해야 했다. 언제나 그랬다. 이겼을 때나 졌을 때나 나는 나의 행복과 슬픔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오늘의 일기를...마친다.” “미생”은 장그래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사회 초년생들의 좌충우돌 성장기다. 주인공인 장그래 주위에는 압도적인 능력으로 선배들까지 기죽게 만드는 안영이, 합리적이고 차분한 장백기, 항상 ‘현장’을 강조하는 열혈남 한석률 등의 입사동기와 ‘샐러리맨의 귀감’으로 여겨질 만한 오과장, 자상하고 든든한 선배 김대리 등이 등장해 ‘백지상태’의 신입사원 장그래가 ‘직장인’으로서 한사람의 몫을 제대로 해나가기까지의 다양한 과정들을 리얼하게 선보인다. 삶의 고단함과 치열함, 살벌한 경쟁 속에서 피어나는 온기, 상생과 공존에 관한 성찰, 조직 속의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 등등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넥타이 부대’들의 지난한 삶들이 한 판의 바둑대국을 보는 듯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압도적이다. 강력하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