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랑 나는 자동차로 바닷가를 달려, 언젠가 셋이서 왔던 먼 동물원에 찾아왔다. 오늘은 생일이다. 아빠 생일은 아니다. 내 생일도 아니다. 엄마 생일이다....아빠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오토바이로 온 세계를 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고, 줄곧 입원 중이었던 엄마도 없어져서, 이제 사진 속의 오토바이는 아빠의 친구가 타고 있다.” “허니와 클로버”, “3월의 라이온”으로 일본을 넘어서 한국에 까지 독자들의 가슴에 큰 울림의 감동을 전해주는 작가 우미노 치카의 ‘초기’ 단편집 “스피카”가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6개의 단편으로 엮어져 있는 이 단편집은 우미노 치카만의 독특한 감수성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책으로 팬들에게는 정말 좋은 선물이 될 듯하다. “저녁 무렵의 하얀 동물원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반딧불’ 노래가 감싼다. 귓가로 미끄러져 들어와 내게 속삭인다. 알고 있었다...어쩌면, 여기 붙잡아 둔 것은 바로 내가 아니었을까? 아빠도, 그리고 기린도....본래 있어야 할 곳에서 이렇게, 이렇게 머나먼 곳에....”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단편들은 “겨울의 기린”, “스피카”, “초록빛 강아지”, “꽃의 요람”, “석양빛 캔디”, “이노센스를 기다리며” 이렇게 총 여섯 편이다. 첫 번째 단편 “겨울의 기린”은 여섯 페이지의 컬러로 이루어진 아주 짧은 단편으로, 돌아가신 엄마의 생일날 아빠와 함께 바닷가 근처의 동물원으로 기린을 보러 온 소년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단편이라기 보단 한 편의 에스프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짧고 강렬한데, 추운 겨울 날 따뜻한 아프리카가 아닌 일본의 동물원에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기린을 보면서, 돌아가신 엄마와 레이서의 꿈을 접고 자신의 곁에 있는 아빠를 생각하며 슬픔에 잠겨 울음을 터트리는 소년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아빠도, 기린도, 본래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이렇게 머나먼 곳에 붙잡아두고 있는 것은, 작고 약한 자신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소년의 모습은,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 미묘한 감정을 읽는 이에게 불러일으키는데, 애잔한 피아노곡이 배경음악으로 곁들여진다면 완벽한 뮤직비디오가 될 것 같은 작품이다. 우미노 치카의 강점은 읽는 이의 폐부를 관통하는 대사와 독백이 감각적인 그림과 적절한 컷 배치 안에 완벽하게 녹아있는 점인데, 이 짧은 여섯 페이지짜리 단편은 바로 그런 이상적인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엄마가 매일 그런 말을 해, 아까 걔들처럼, 그 길로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은, 수천 명에 하나라고, 혹시 그 길로 못 나가면, 웃음거리만 된다고...그러니까 그 전에 그만두라고, 뭔가를 좋아한다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이야? 웃음거리가 될 만큼?” 두 번째 단편 “스피카”는 고등학교를 무대로 펼쳐지는 섬세하고 훈훈한 작품이다. 우미노 치카 특유의 장점이 자연스럽게 잘 살아있는 이 단편은 자신의 꿈에 대해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소녀와 자신의 꿈에 다가갈 수 없는 좌절을 이미 겪은 소년의 애틋한 이야기다. “있지, 미소노, 난 말야. 2학년 여름까진 주전이었어. 하지만 작년 여름대회가 끝나고, 연습시합 때 인대가 끊어져서, 지금도 왼쪽 다리는 예전처럼 움직이질 않아. 주전에서 탈락되고, 재활치료도 오래 걸렸지, 하지만 야구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어. 그래서 시합에 나가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냈어. 연습 메뉴 짜기, 스케줄 관리...그리고 멤버들이 마음껏 야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공부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로 했지. 그래, 말하자면 나는, 아까 그 이야기에 나오는 ‘실패했을 경우’에 해당하는 셈인데...어때? 미소노는 나를 비웃을 거야?” 발레리나가 되고 싶은 소녀 미소노는 주위의 걱정과 반대, 특히 엄마의 반대가 가장 힘들다. 발레리나로 ‘먹고살 수 있는 건’, 선택받은 한줌의 재능을 가진 극히 일부의 사람들뿐이라며 지금이라도 자신의 딸이 발레를 그만 두고 좀 더 평범하고 안정적인 꿈을 갖길 바란다. 하지만 발레를 가슴 속 깊이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는 미소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가 없다. 짜증나고, 불안하고, 슬퍼서, 자신의 처지가 힘들게만 느껴져 미소노가 울어버리고 만 순간, 중간고사 문제로 신세를 지게 된 야구부 부부장 타카사키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자신이 너무도 사랑하는 야구를 부상으로 인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타카사키는 아주 어른스러운 태도로 미소노를 격려한다. “울어도 그만둘 수 없을 만큼 좋아하는 게 있다는 건, 분명 굉장한 일일 거야”라며, 이미 한 번 절망의 늪을 겪었던 동갑내기 소년의 진심이 묻어나는 위로는 움츠렸던 미소노에게 진정한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28페이지의 단편 “스피카”는, 아주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읽히고, 한 번 강하게 뭉클해지며, 청춘들의 에너지가 전해주는 잔재미를 쏠쏠하게 즐길 수 있는 이야기다. 등장인물들 간의 단 한 번의 대화로 이렇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단편은 사실 많지 않다. 이것이 우미노 치카라는 작가의 재능이자 역량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보일 때는 생각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다시 보게 하고 싶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정말 소중한 것은 이미 내 손 안에 쥐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세 번째 단편 “초록빛 강아지”와 네 번째 단편 “꽃의 요람”은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사는 귀엽고 씩씩한 소년 키오를 주인공으로 한 연작 시리즈다. “초록빛 강아지”는 ‘소년 탐정단’같은 분위기의 아기자기한 재미를 주는 이야기이고, “꽃의 요람”은 괴팍한 성격의 과학자를 등장시켜 ‘사랑’의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 주는 애잔한 이야기다. 다섯 번째 단편 “석양빛 캔디”는 약간 ‘야오이’ 느낌이 묻어나는 여섯 페이지짜리 이야기로 방과 후 학교에서 벌어지는 교사와 학생간의 짧은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여섯 번째 단편 “이노센스를 기다리며”는 사실 단편이라기보다는 우미노 치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리뷰 같은 느낌이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패트레이버’와 ‘공각기동대’에 관한 자신의 소감을 풀어낸 것으로 작품 속에서 좋아하는 분위기나 캐릭터에 대한 우미노 치카의 생각이 담겨 있다. 작가 후기에 보면, 이 책에 담겨진 여섯 개의 단편은 2000년부터 2004년에 그린 작품이 들어있다고 한다. 작가 자신의 말로 ‘10년 전 나의 최선’이 모인 단편집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이 책의 인세는 모두 동일본대지진 재건 기금으로 쓰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