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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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예 소년

“내 입으로 말하기도 뭐하지만 난 굉장히 온순한 성격이다. 요령도 나름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초중학교 내내 별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적당히 머리 굴리고 적당히 싹싹하게, 앞으로도 그렇게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타로 이야기”, “미운 오리...

2012-10-17 석재정
“내 입으로 말하기도 뭐하지만 난 굉장히 온순한 성격이다. 요령도 나름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초중학교 내내 별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적당히 머리 굴리고 적당히 싹싹하게, 앞으로도 그렇게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타로 이야기”, “미운 오리 왕자님”, “극락청춘 하키부”, “나와 그녀의 XXX”, “키라라의 별” 등 수많은 힛트작을 발표하며 국내에도 많은 팬을 보유한 일본 작가 모리나가 아이의 한 권짜리 단편 “원예소년”이 한국어판으로 발행되었다. “3년 후엔 어떤 기분으로 졸업을 하게 될까?” 모리나가 아이의 작품은 유쾌하고 상큼한 기분으로 즐길 수 있는 청춘 코미디가 그 특색이자 장점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 소개하는 “원예소년”은 원작자가 따로 있는 작품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평범한 일상에 녹아들지 못하고 주변인으로만 겉돌던 세 명의 소년이 우연한 계기로 원예부에 들어가 긍정적으로 성장해간다는 내용의 짧은 이야기다. “사람은 겉모습이 다가 아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중심인물은 세 명의 소년이다. 셋 다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신입생으로 평범하지 않은 청춘들이다. 첫 번째 소년인 시노자키 타츠야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보면 적극적이지도 소극적이지도 않은 무심한 태도를 지닌, 어딘가 겉도는 느낌이 강한 소년이지만, 무언가에 몰입하면 상당히 열심히 하는, ‘조용한 열정’을 지닌 소년이다. 두 번째 소년은 겉모습만으로는 어디가도 ‘불량 양아치 소년’이라는 소릴 들을만한, 개성 넘치는 외모를 지닌 오와다 잇페이다. 실제로 오와다는 중학 시절 불량소년들과 그룹을 형성해 놀러 다니던 화려한 양아치 경력이 있지만, 원래 성격은 노약자를 최우선적으로 공경하고 어디서나 예의 바르려고 노력하는, 겉모습과는 매우 다른 착한 심성의 소년이다. 세 번째 소년은 장기간의 등교거부로 이젠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게 된 심약한 소년 쇼지 요시오다. 학교 측의 배려로 상위권의 성적을 계속 유지하기만 하면 교실에 입소하지 않고 상담실로 등교하는 것만으로도 출석한 것으로 인정받게 된 쇼지는 항상 종이박스를 쓴 채로 자신의 얼굴을 절대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매우 특이한 소년이다. 명석한 두뇌로 뛰어난 학업성적을 유지하고 있는 쇼지이지만, 정작 삶에 필요한 인간관계를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하며 상담실 구석에서 시노자키와 오와다가 화분을 가꾸는 걸 지켜보고만 있다가 우연한 계기로 원예부에 합류하게 된다. “생각해 봤는데 이 학교에 들어와 열흘을 지내면서 가장 재밌었던 건 축 쳐져 있던 풀들이 쌩쌩해지는 걸 보는 거였어.” “원예소년”은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는 그대로, 학교의 평범한 일상에 녹아들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던 이 세 명의 소년이 화분을 가꿔가면서 서로가 조금씩 성장해간다는 매우 긍정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난 상자를 쓰지 않고는 밖에 나갈 수가 없어.” 원예(園藝)란, 한자의 뜻 그대로 정원을 가꾸는 행위 또는 기술을 뜻한다. 원(園) 자는 동산, 과수원, 정원 등을 뜻하는 한자고, 예(藝) 자는 심다, 기예, 궁극 등을 뜻하는 한자다. 세상의 생명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식물과 동물로 나눌 수 있고, 원예란 바로 이 식물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 또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성향을 육식계니 초식계니 하는 단어로 나눈다거나 동물적인 사람, 식물 같은 사람으로 분류하는 것을 보면 식물이 지니는 의미가 참으로 넓고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체로 식물이 지닌 이미지란 평화, 온순, 부동(不動), 정적, 근본, 선(善), 풍요, 공존 등의 이미지이고 흔히들 ‘식물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이런 이미지를 지닌 사람들을 뜻한다. 남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거나 활달하고 열정적으로 행동하기 보다는, 조용하고 눈에 잘 띠지 않으면서도 성실하고 단단한, 무언가 꿋꿋한 생명력을 지닌 사람들 말이다. 이 작품에서도 주요한 사건이자 주제로 잡은 것은 ‘상자를 쓰지 않고는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소년’ 쇼지가 원예부 친구들과 식물을 기르면서 또래 친구들과의 조용하고 섬세한 교류를 통해 자신의 얼굴을 가린 상자를 벗고 남들 앞에 나설 수 있게 될 때까지의 과정이다. “물을 안 주는 것도 나쁘지만, 너무 많이 주는 건 더 나빠서 뿌리가 썩게 됩니다. 흙의 건조 상태도 확인하지 않은 채 매일 물을 조금씩 형식적으로 주는 건 최악...” 아마도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소년의 얼굴을 가린 상자를 부수게 만들어주는, 조용하고 단단한 식물의 힘을, 그 활기찬 생명력을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식물을 기른다는 것은, 인간의 성장과도 아주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 행위임을 조금만 유심히 관찰해 봐도 알 수 있다. 물을 너무 많이 주면 썩어버린다거나, 햇빛을 너무 많이 쐬면 오히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거나, 주어진 환경에 맞추되 절대로 지나치게 행동하지 말아야한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원예다. 작품의 주인공인 세 명의 소년들 역시 처음엔 별 관심 없이 시작했던 원예부 활동이 그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자신들의 삶을 조금씩이라도 긍정적으로 바꾸어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을 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명이 있는 무언가를 자신의 손으로 가꾸어나간다는 기쁨, 아주 조그만 싹에도 생명이 들어있다는 귀중한 진리,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 일인지를, 그저 ‘주변인’으로만 머물렀던 세 명의 소년들은 작은 화분을 가꾸고 화단에 물을 주면서 진심으로 깨닫게 되어가는 것이다. 흥미진진한 에피소드 따윈 전혀 등장하지 않는, 아주 심심하고 소소한 이야기지만, 삶에 지쳐 주저앉아 있는 이들이 있다면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