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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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인간은 부끄러움을 안다. 지혜가 있으며, 이성이 있다. 하지만...쾌락을 얻기 위해 개구리 같은 미련한 자세가 된다. 결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서로의 성기를 탐하며 정신없이 빠져든다. 우리는 어쩌면 그토록 무서운 것을 사타구니에 달고 있을까.” 일본에 가서...

2011-06-15 김현우
“인간은 부끄러움을 안다. 지혜가 있으며, 이성이 있다. 하지만...쾌락을 얻기 위해 개구리 같은 미련한 자세가 된다. 결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서로의 성기를 탐하며 정신없이 빠져든다. 우리는 어쩌면 그토록 무서운 것을 사타구니에 달고 있을까.” 일본에 가서 가끔 깜짝깜짝 놀랄 때가 낯 뜨거운 내용을 길거리에서 공공연히 홍보하는 AV 관련 사업을 접할 때다. 우리나라로 치면 DVD 대여점 같은 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AV는 ‘Adult video’의 약자로, 말 그대로 일본산 포르노를 뜻한다. p2p 공유사이트에서 아무런 고민 없이 무제한으로 포르노를 다운받는 한국 남성분들에게는 ‘그까짓 포르노가 뭐 어때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일본 AV산업은 연간 2000만개가 넘는 발매량과 4000억 엔이 넘는 규모를 자랑하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거대 산업이다. 미국이나 일본, 유럽 등 소위 ‘선진국’에서는 ‘섹스산업’이 차지하는 경제규모가 워낙 막대하고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발달하면서 이 산업분야는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추세다. 성인들의 기본적인 욕구나 비밀스러운 욕망마저도 법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무지막지한 나라 한국에서는 이 분야의 산업이 양성화되거나 거대규모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는 거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얘기고, 아마도 계속 음성적인 루트로 ‘어둠의 경로’를 잠식하는 장사수단으로 활용되거나, 얼마 전에 있었던 사건처럼 미국이나 일본의 “섹스사업자”들이 불법으로 자신들의 저작물을 다운받거나 대량으로 유포시키는 한국의 네티즌을 고소하겠다는 일들이 앞으로도 계속 생겨나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내게 자위는 미지의 세계다.” 갑작스럽게 이런 장황한 얘기를 꺼낸 이유는 이 리뷰를 통해 소개할 일본 만화책 “셀프(self)” 때문이다. “19세 미만 구독불가”라는 빨간 딱지를 책 표지에 당당히 달고 있는 이 만화는 ‘자위행위’에 관한 심도 깊은 상상력이자 ‘일본인이 아니면’ 만들어내지 못할 기발한 성인만화라고 생각된다. (상상력을 법적으로 제한한 한국에서는 절대 만들지 못할 만화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땐 그저 수많은 일본산 성인만화 중 하나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읽기를 거듭할수록 이 책은, 그저 단순히 남성들의 욕망을 자극해서 권수나 늘여 가려는 유치하고 저급한 성인만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요이치는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는 잘생기고 매너 좋은 자상한 남자다. 여자들에게 음으로 양으로 모두 인기가 좋은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자위를 해본 적이 없는 특이한 남자다. 어릴 적 우연한 계기로 접하게 된 첫 경험 이후로 이상하리만치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요이치는 굳이 자위를 할 필요가 없는 행복한(?) 남자였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여자들과의 관계 자체가 덤덤하고 무미건조해서 섹스를 해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였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자위’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때부터 요이치는 타고난 성실함과 탐구심으로 마치 연구를 하듯 ‘자위행위’를 탐닉해간다. “인간은 모두 성기의 노예야.” 이 책의 특징은 ‘자위행위’라는 소재 하나만으로도 이렇듯 이야기를 확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 독자들에게는 어떻게 느껴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자인 나로서는 요이치의 ‘자위’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꽤나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현재 한국어판으로 3권까지 나와 있는데 다음 권도 사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마 남자라면 주인공인 요이치와 같은 생각을 해본 이들이 꽤 많을 것이고, 또 한 편으로 이건 너무 오버다, 라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꽤 많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단순한 소재 하나로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이 만화의 숨겨진 저력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하고자 한다고 해서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듯이, 일본 만화산업의 굳건하고 다양한 토양들이 이런 만화를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리라. 일본만화들의 이러한 다양성은 결코 만화산업 단독으로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 음악, 공연, 엔터테인먼트, 방송, 게임 등등의 관련 산업부터 앞서 얘기한 거대한 규모의 AV산업까지, 음 과 양을 통틀어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이 서로 교류하고 상호간에 영향을 끼치면서 이러한 독특한 상상력이 나오게 된 것일 거다. “나는... 그녀들의 성기의 노예다. 물론 나 역시도 육체적 쾌감을 느끼지만, 상대가 느끼는 깊은 쾌감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섹스는 여자의 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려면 남자는 아무 준비 없이 읽으면 되고, 여자는 다소 준비를 해야 한다. 이야기 자체가 굉장히 남성적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해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공감도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여자 독자분이 이 책을 읽는다면, 그냥 남자의 한 단면을 이해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접하길 바란다. 이 책에 나온 요이치의 모습은 대부분 작가가 만들어 낸 판타지이기 때문에 모든 남자들이 이럴 거란 생각은 하지 말기를 바란다. “섹스는...상대방도 생각해야 하니까, 그런 귀찮은 거 다 생략하고 내 페이스대로,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마음껏 즐기고 싶다. 너도 그럴 때 있잖아?” 이 책의 주제는 ‘나 자신을 위한 성(性)’이다. 제목 자체에서 의미하듯이 자신을 위해 섹스를 해본 적이 없는 독특한 남자가 자위행위에 빠져들면서 자신만을 위한 쾌감을 알아나간다는 진지하고 유니크한 내용이다. 물론 이야기가 있는 만화인 이상, 요이치의 자위행위가 이야기의 다는 아니다. 요이치 주변의 여자들, 애인, 가족, 새로운 인연, 직장, 사회관계 등등 주위의 모든 것이 연결되고 순환되어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이루게 된다. 독자는 그저 작가가 만들어 놓은 이 독특한 세계에 몸을 맡기면 된다. 언젠가는 우리나라 작가들도 이런 독특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