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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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넨과 거즈

“하늘은 푸르고, 밥은 맛있게 먹을 수 있고, 몸은 건강하고, 열중할 수 있는 일도 있는, 난 정말 행복한 사람, 일도 순조롭다,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일본의 만화 리뷰를 읽다보면 가끔 “치유계(治癒系)”라는, 한국에서는 잘 쓰지 않는 단어를 만날 때...

2011-06-10 석재정
“하늘은 푸르고, 밥은 맛있게 먹을 수 있고, 몸은 건강하고, 열중할 수 있는 일도 있는, 난 정말 행복한 사람, 일도 순조롭다,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일본의 만화 리뷰를 읽다보면 가끔 “치유계(治癒系)”라는, 한국에서는 잘 쓰지 않는 단어를 만날 때가 있다. ‘치유(治癒)’는 말 그대로 병이 낫는다, 고친다는 뜻의 그 ‘치유’고 ‘계(系)’는 ‘계통(系統)’의 ‘계’다. 직역하면 병을 고쳐주는 계통이란 뜻으로 해석되는데,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 힘들고 지쳐있거나, 슬프고 아프거나, 할 때가 있으니 그런 안 좋은 상태의 몸과 마음을 위로해주거나 달래주는 만화라는 뜻으로 쓰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 소개하는 “리넨과 거즈”는 계통을 굳이 분류하자면, 앞서 얘기한 “치유계(治癒系)”의 만화라 불릴 수 있을 것 같다. 남편과의 충돌로 갑작스러운 별거에 들어간 언니와 언니의 손에 이끌려 나타난 어린 여자 조카가 주인공의 집에 같이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소하고 아기자기한 일상을 여성 작가 특유의 감수성으로 잔잔하게 펼쳐내는 만화다. “내 작품을 갖고 싶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많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할 수 있고 그 일이 정신없이 바쁘다니,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야, 설령 혼자 울 수 있는 곳이 욕실밖에 없다 하더라도” 주인공인 카와노는 손재주가 아주 좋고 감각이 있어서 수예로 직접 만든 소품들을 인터넷 쇼핑몰에서 파는, 아마추어와 프로의 중간쯤에 위치한 디자이너다. 물론 인기가 있다고 해도 동네 수준의 소소한 수작업이지만 어쨌든, 예전에 일했던 카페 손님들이나 공방에서 소개한 사람들 중심으로 평판이 매우 좋은 디자이너다. 앞치마나 컵받침 같은 간단한 것부터 가방, 지갑, 원피스 같은 난이도 높은 것까지 자신만의 감각을 살려 직접 손으로 만들기 때문에 고객들에게 반응이 좋다.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의 상품들을 직접 팔기도 했던 카페를 그만 두고 집에서 작업에만 집중하려했던 카와노의 새로운 인생계획은 갑작스러운 언니의 별거로 인해 산산이 부서진다. 그 이유는 다섯 살짜리 여자 조카, 코코미 때문이다. 직업의 특성상 집에서 주로 지내는 카와노이기도 하지만 유독 이모를 잘 따르는 코코미는 이모를 잠시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놀아 달라, 어딜 가자, 같이 무언가를 하자 등등 조카의 어이없을 정도로 천진난만한 요구에도 잘 맞춰주는 카와노이지만 ‘일’의 영역까지 심각한 방해를 받게 되자 서서히 스트레스가 쌓여간다. 이 만화가 재미있어지는 건 바로 이 지점부터다. “쓸쓸하지만, 쓸쓸하단 생각만 하며 지내지 않는 건, 혼을 쏙 빼놓는 다섯 살배기 덕분인 것도 사실... 품이 넉넉하고 입으면 편안한 원피스, 어른은 리넨, 아이는 거즈로 해서, 커플로 만들어볼까”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끈끈하면서도 편안한 느낌,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의 교감, 이런 것들로부터 멀어져있었던 분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잔잔하고 따뜻한 만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