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 맨
“유명한 블루스 전문음악인 상당수는 미시시피 델타지역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그곳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텍사스 전역부터 대서양까지 남부지방 대부분의 흑인사회에는 그 지역사회 내에서만 활동하던 블루스 음악인들이 있었다. 또한 유명해지고 싶거나 자기 연주곡 목록을 알리기 ...
2010-10-19
유호연
“유명한 블루스 전문음악인 상당수는 미시시피 델타지역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그곳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텍사스 전역부터 대서양까지 남부지방 대부분의 흑인사회에는 그 지역사회 내에서만 활동하던 블루스 음악인들이 있었다. 또한 유명해지고 싶거나 자기 연주곡 목록을 알리기 위해 사방을 여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20년대에 녹음된 블루스 음악의 인기는 떠돌이 블루스맨이란 전통을 만들어냈다. 그뿐 아니라 블루스 음악을 하는 비노동계층에게 유일한 밥벌이가 돼 주었다. 떠돌이 생활은 힘들었다. 때로는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각 지방 선술집에서의 연주는 나름의 장점도 있었다. 그곳의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었고 밀주, 여자, 노래가 공존했기에...가끔 그들의 삶은 힘든 일과 가난으로 찌든 노동자보다 낫게 보였다. 평범치 않은 신분과 장기간의 떠돌이 생활로 심신이 얼룩진 그들은 때때로 일부 지역사회와 애증의 관계에 놓이기도 했다. 이런 블루스맨들은 남부 여러 흑인 사회에 있어, 고통으로부터 피난처이자 동시에 백인 중심의 사회가 그들에게 부여한 편견을 전가하는 손쉬운 대상이 되었다.” 기타케이스를 손에 쥔 사내 하나가 음울한 햇살이 비치는 어느 초원을 걷고 있는 책표지는 무언가 강렬하면서도 씁쓸한 느낌을 전달해주었다. 그 남자의 모든 것이 검은 음영으로 처리되어 있어 그 남자의 표정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왠지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이 그의 표정 안에 녹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목은 “BLUESMAN”, 이것이 내가 아는 그 블루스 음악에 관한 책이라면, 하는 생각에 얼른 집어 들었다. “지금 사업얘기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좀 더 자세히 들어봅시다. 그 술집이 어디에 있고 또 얼마를 줄 것 같습니까?” 블루스는 ‘blue"에 그 어원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는 블루스라는 음악이 블루라는 색깔이 주는 색감처럼 우울하고 씁쓸하며 묵직한 느낌을 주는 것과 상통하는 면이 있을 것이다. 지금에야 재즈와 더불어 흑인음악의 양대 산맥 대우를 받는 블루스지만, (동양권인 우리나라 가수들조차 노래 좀 부른다하는 가수들은 모두 소몰이를 하게 만든 블루스이기도 하지만^^) 이 음악은 원래 신대륙으로 끌려와 중노동에 시달리며 백인들에게 학대받던 흑인 노예들의 노동요(勞動謠)이자, 절망의 창법으로 희망을 노래하는 영혼(Soul)의 음악이다. 블루스의 발생지로 자주 언급되는 미시시피 강 유역의 델타(삼각주)지역은, 강 유역에서 북쪽으로 수 백 마일 떨어져 위치한 V자형의 비옥한 저지대로써 멤피스의 남쪽과 미시시피 남부의 구릉 지대를 점유하고 있다. 이 지역은 흑인 인구가 백인과 거의 동등할 뿐만 아니라 백인 인구를 훨씬 웃도는 마을도 많아서 기타나 하모니카 같은 서양 악기를 입수할 수 있었던 흑인들이나 악기를 갖지 못한 흑인들까지도 그 독자적인 음악성에 의해서 개인의 생활 감정을 노래로 표현하였다고 한다. 주로 가난이나 시련 또는 고통 속에 생활의 탄식· 괴로움 · 슬픔 ·절망감 등의 감정을 노래로 엮었는데, 이러한 노래나 가창에는 필드할러, 샤우트, 흑인영가의 절규와 리듬과 필링이 있었다. 언제부터 부르게 된 이름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블루스란 바로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노예 해방이후 흑인과 백인(주로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계)이 서로 고유의 노래를 나눔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음악, 즉 블루스가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라 생각된다. (백인들의 음악은 ‘컨츄리’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내는 자기 여자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항상 문제를 일으키게 돼 있어, 인생은 가혹한 진실 투성이야...” 여기에 소개하는 “BLUESMAN”은, Rob Vollmar가 스토리를 쓰고 Pablo G. Callejo가 작화를 맡은 그래픽 노블같지 않은 그래픽 노블로, 한국어판으로는 2009년 코리아하우스에서 출간하였다. 블루스 음악의 ‘시원’(始原)이라 불리는 ‘미시시피 델타지역’을 떠돌며 연주와 노래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떠돌이 블루스 연주자들의 이야기 안에, 당시 미국 사회에 존재했던 인종차별의 실상을 여과 없이 담아낸, 사회성 짙으면서도 애잔한 감동이 뭍어나는 묵직한 이야기로 결말 부분의 반전이 주는 감동이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의 목탄화 느낌이 나는 흑백 그림은, 컬러로 표현된 것보다 훨씬 강렬한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하는데, 이야기와 그림이 이렇게 잘 조화되어 있는 작품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만약 내가 기도를 한다면...그건 살아날 수 있는 누군가를 위한 겁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주인공 두 명이 부르는 노래를 상상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는 음악이 맞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어떤 느낌의 곡인지도 전혀 감이 안와서 답답했다는 이야기다. 번역자가 번역을 할 때 뮤지션과 노래제목만이라도 각주를 달아두었다면,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부르는 노래들을 하나하나 찾아 들어보면서 이 작품을 훨씬 더 깊이 음미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그냥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 장르의 대표곡들을 몇 곡 찾아 들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 작품에 대해 인터넷 서핑을 해보니, 128p에서 백인들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던 램이 자신을 구해준 다른 도망자들에게 불러주는 노래가 그 유명한 “The House of Rising Sun”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 노래를 알게 된 후 거의 20여년동안, 이 노래는 “The Animals”이라는 백인 그룹이 부른 노래(1964년)라고 알고 있었는데, 밥 딜런도, 존 바에즈도 불렀고,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부른 사람들은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었다고 한다. “The House of Rising Sun”을 들으면서 그 부분을 다시 읽어보니, 그 장면이 주는 분위기와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잠깐 동안 아주 먹먹한 느낌을 받았다. “행운을 함께 나누는 정이랄까...아무튼 그런 분위기였던 거 같다, 한 사람이 다 차지하는 것보다...영원한 분배가 낫지 않을까...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형제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사람을 남겨주지 않는다.” “BLUESMAN”은 아주 독특한 느낌의 그래픽 노블이다. 한 떠돌이 연주자의 고달픈 여정을 통해 인생의 참맛을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랄까? (우리나라로 따지면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같은 느낌의 작품이다.) 현재 헐리우드에서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을 맡고 이 작품을 영화화 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만약 사실이라면 꼭 우리나라에도 개봉하길 바라고 있다. 이 작품의 곳곳에 흐르는 음악들과 음울하고 애잔한 그 느낌을,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으로도 느껴보고 싶기 때문이다. 특히나 인상 깊었던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 늙어버린 비슬리의 집에서 레코드를 통해 흘러나오는 램의 노래 소리를 꼭 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