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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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월 - 朔月 (서문다미단편집)

“어렸을 때 어두운 걸 무서워하던 내게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왜 밤이 무섭다는 거냐? 괴물이라도 나올까봐 두렵니? 어둠 속의 괴물 따윈 무서워 할 필요도 없는 거란다. 밤이란 그저 눈을 감은 세상일 뿐...눈을 뜨면 알게 될 거다. 어떠한 밤이 지나가도 세상은 항상 ...

2010-10-08 김진수
“어렸을 때 어두운 걸 무서워하던 내게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왜 밤이 무섭다는 거냐? 괴물이라도 나올까봐 두렵니? 어둠 속의 괴물 따윈 무서워 할 필요도 없는 거란다. 밤이란 그저 눈을 감은 세상일 뿐...눈을 뜨면 알게 될 거다. 어떠한 밤이 지나가도 세상은 항상 그 자리에 있고, 너 역시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삭월(朔月) : 음력 초하룻날의 달. 달이 지구와 태양 사이에 들어와 일직선을 이루어 지구에서는 보이지 아니한다. 독특한 감수성으로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작가 서문다미가 2003년 발표한 단편집 “삭월”은, “화빙”, “삭월(朔月)”, “귀향”, “Malicious Joke”, “수중화(水中花)”, “ILLUSION”, “껍질의 각인” 등 7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볼륨감 있는 작품집이다. “혼의 형(形)만을 타고난 사람들, 인간의 영혼을 보름달이라 할 때, 혼령사의 영혼은 그믐달과 같이 텅 비어서 태어난다. 왜 그러냐고 묻지 마, 아무도 모르니까...다만 우린 혼이 비어서 태어났고, 때문에 본능적으로 혼을 채우기 위해 다른 영혼-유령 같은-을 흡수해야 한다는 거지...뭐, 생존본능이랄까? 유령을 보고, 듣고, 잡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야, 혼이 완전해지는 순간 그 능력들도 사라지며 보통 인간이 되겠지만...그 전까지 우린 죽어서도 혼령사이다.” 첫 번째 이야기 “화빙”과 두 번째 이야기 “삭월”은, ‘혼령사’라는 소재로 이루어진 판타지다. 영혼이 그믐달과 같이 텅 비어서 태어나는 혼령사 일족들은 생존을 위해 다른 영혼을 잡아먹어야 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특수한 능력(유령이 보인다거나, 빙의된 사람을 알아본다거나, 영혼을 흡수할 수 있는)을 가지고 있어, 보통 인간과는 아예 종족이 다른 존재다. “이름은 화빙(火氷). 평소엔 이 수뢰침으로 유령을 수집하지만, 지금은 친구의 영혼을 찾고 있는 혼령사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여고생 수림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수수께끼의 남자 화빙에 의해 생명을 잃을 뻔한 위기를 겪게 되고, 그 것이 인연이 되어 자신이 화빙과 짝을 이루는 영매사(또는 혼령사) 일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첫 번째 이야기 “화빙”은 드라마적 구성이나 연출, 작화 등 서문다미의 팬인 나로서는 모든 것에서 불만족스러운 작품이지만, ‘친구의 영혼을 찾아다니는 혼령사’라는 컨셉과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서 밝혀지는, 화빙이 찾아다니던 영혼이 그가 사랑했던 여자, 준의 영혼이었다는 스토리의 묘한 여운이 마음에 든다. “혼령사, 혼의 형(形)만을 타고난 사람들, 달의 정기를 받아 비어있는 영혼의 그릇을 안고 혼을 채우기 위해 퇴마(退魔)의 길을 걷는다. 영혼을 사냥하고 원령과 대화하며 혼을 먹는 영혼의 포식자, 명심하라, 그들은 포악하다, 인간과 마(魔)의 경계에 선 그들을 경계하라, 완전한 혼을 찾는 이지러진 그믐달, 그들을 일컬어 삭(朔)의 일족이라 한다.” 두 번째 이야기인 “삭월”은, “화빙”의 과거에 해당되는 이야기로, 어린 화빙이 사립탐정으로 일하는 혼령사 준을 만나 혼령사로서 성장해가는 과정과 준이 어떻게, 무엇 때문에 육체가 없는 혼령사가 되어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존재가 되었나를 밝혀주는 이야기다. “영혼만 남은 여자가 있었다. 여자를 찾아 헤매는 소년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삭월”은 홍콩을 무대로 벌어지는 판타지 액션활극으로, 준과 화빙의 만남에서부터 헤어짐까지 탄탄한 극적 구성을 통해 짜임새 있게 만들어진 수작(秀作)이다. 마지막 엔딩 장면에서 느껴지는 쓸쓸한 여운이 읽는 이의 마음을 자극하는 단편으로, 한 편의 슬픈 판타지 영화를 본 것 같은 마무리가 맘에 들었다. “화빙”과 “삭월”은 페어를 이루는 작품으로, 읽는 순서는 상관없지만, 편집부의 구성을 따르는 것이 가장 무난한 듯하다. “에이샤, 나 돌아왔어....” 세 번째 이야기 “귀향”은, 서문다미의 특기인 SF 판타지의 공력이 제대로 발휘된 단편으로, 자신이 클론인간인줄 모르고 살았던 한 청년이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고, 자신의 창조주인 인간을 찾아 나서게 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펼쳐낸 작품이다. 결말 부분에서 출생의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클론의 모습을 한 남편과 이제는 늙고 쇠약해져 일어서지 못하는 아내가 시공을 초월해 애틋한 재회를 이루게 되는 장면이 아주 인상 깊었다. “아마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이젠 남은 평생의 시간을 모두 걸어야 하거든, 하여간 들어줘서 고마웠소, 호미가 기다릴 테니 더 이상 있을 수 없군, 그럼...” 네 번째 이야기 “Malicious Joke”는 악마와 카드게임을 하며 자신의 수명(壽命)을 거는 어느 도박사의 이야기로 마지막의 반전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다섯 번째 이야기 “수중화(水中花)”는 청춘의 사랑이 막 시작되는 순간을 트랜디 드라마처럼 잡아낸 깔끔한 느낌의 작품이다. 여섯 번째 이야기 “ILLUSION”은 미래가 보이는 능력이 생겨버린 여고생이 본의 아니게 주위 사람들의 미래를 자꾸 보게 되면서 벌어지는 가벼운 느낌의 러브스토리로, 코미디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여기 있었구나, 민혁아....이게 니가 원하던 자유였니? 멍청아...이건 자유가 아니고 포기잖아...” 일곱 번째 이야기 “껍질의 각인”은, “삭월”에 실린 7편의 단편 중에서 개인적으로 최고의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이다. 고교시절 있을 수 있는, ‘동성(同性)에 대한 연정(戀情)’을 소재로 두 명의 남학생이 풀어나가는 이 묵직하고도 섬뜩한 이야기는, 맨 마지막에 구교사에서 민혁의 시체를 발견한 하진이의 독백이, 읽는 이의 가슴을 칼로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을 주는, 강렬한 여운이 느껴진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본 제대로 된 반전이었다. 작가 후기에 보면 “극악한 작화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의 감성이나 스토리라인은 꽤 만족스러웠던 이상한 녀석입니다.”라는 서문다미의 멘트가 실려 있는데, 개인적으로 무척 공감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