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제로)
“약품명 170-1248. 통칭「제로」, 전생에 관한 꿈을 꾸게 해주는 약, 꿈에서 볼 수 있는 건 2000년의 자기 모습으로 제한되어 있다.” “보이”의 작가 야마자키 타카코의 SF묵시록 “ZERO”는 중국의 핵실험 여파로 도쿄 자체가 붕괴된 후 살아남은 소수의...
2010-10-02
김현우
“약품명 170-1248. 통칭「제로」, 전생에 관한 꿈을 꾸게 해주는 약, 꿈에서 볼 수 있는 건 2000년의 자기 모습으로 제한되어 있다.” “보이”의 작가 야마자키 타카코의 SF묵시록 “ZERO”는 중국의 핵실험 여파로 도쿄 자체가 붕괴된 후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을 미군이 수용소 시스템으로 관리한다는 설정으로 출발하는, “보이”의 작가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어둡고 무거운 감수성의 SF다. “지팡구 오브 아웃사이드 옵져베이션(생략해서 ZOO), 합중국이 일본을 감시하기위해 만든 표면적으로는 일본 원조를 목적으로 하는 이 군사기지는 일본인을 2만 명 수용하고 있고 치바반도 동쪽에 16년 전에 세워졌다. 그러니까 2000년 지금부터 17년 전의 이야기다. 중국이 핵실험을 위해 핵을 수송하던 중 문제가 발생, 일본 근해(태평양 측)에 핵이 곤두박질 쳐졌다. 때문에 몇 백만 명의 희생자와 도시의 기능 정지, 파편들 속에 있는 엄청난 양의 방사능으로 사람들은 수도를 떠났다. 생존자는 고작 10만 명이라고 일컬어지는 가운데 그 중 2만 명이 이 ZOO에 나머지는 별도의 기지에 수용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합중국 측의 정보로는 수도의 존재 여부가 여전히 확실치 않다. 소문으로는 방사능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되어 도쿄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고들 하지만, 여하튼 그 후 부터는 2000년 그러니까 그 사고 이전을 구력으로 제로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SF의 생명은 설정이다. 작가의 스토리나 감수성, 세계관 같은 것은 차후의 문제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설정 같은 것은 없다. 너무 현실과 동떨어지거나 너무 황당하면 이야기 자체에 설득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공한 SF작품은 대부분, 정말로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은, 지극히 설득력 있는 설정으로 출발한다. “총몽”의 공중도시가 그랬고, “공각기동대”의 전뇌시스템이 그랬다. 에반게리온의 “세컨드 임팩트”도 꽤나 설득력 있는 설정이었다. “나는 5살 때 이곳에 왔는데 아무래도 ZOO에서 태어났었나 보다. 알고 보니 신분증명 크리스탈이 귀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6살 때 의무적으로 바코드를 부여받고 그룹에 편성되었다. 그때 같은 거주구역(E동)이었던 녀석들이 지금까지 고스란히 친구로 남아있다. 모두들 16살로 2000년 태생, ZOO세대(카이에의 동생 이자야만 빼고)이다. 말하자면 제로로 이전 세대를 볼 수 있는 가장 큰 아이들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ZERO”의 설정은 나쁘지 않았다. ‘도쿄가 멸망한다’는 설정은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고, 살아남은 극소수의 일본인들을 미국이나 중국이 개입해 관리한다는 설정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로’라 명명한 약이다. 작가는 ‘전생’이라는 코드를 통해 현재와 과거를 마구잡이식으로 넘나든다. 이야기가 무척이나 산만한 것은 “보이”에서와 마찬가지지만, SF장르에서는 무척이나 치명적인 문제다.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 독자가 적응을 해야 하는데 시간 개념이 뒤죽박죽이라 도무지 그럴 틈을 주지 않는다. 이 작가의 팬이라면 환영할만한 작품인지 몰라도, 일반적인 독자라면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닌 듯하다. 11권으로 완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