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애벌레
“서울은 하나의 거대한 쓰레기장이야, 그 속에서 뒹구는 인간들을 더러운 벌레들이고 말이야, 그럼 우리는 아직 다 크지 못한 애벌레들이겠지...” 이현세의 1989년 作 “춤추는 애벌레”는, 이현세의 사회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그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주인공...
2010-09-30
석재정
“서울은 하나의 거대한 쓰레기장이야, 그 속에서 뒹구는 인간들을 더러운 벌레들이고 말이야, 그럼 우리는 아직 다 크지 못한 애벌레들이겠지...” 이현세의 1989년 作 “춤추는 애벌레”는, 이현세의 사회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그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주인공 오혜성의 “반영웅(反英雄)”적인 면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현세의 작품 속에서 오혜성이 “Anti-hero”로 출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그도 그럴 것이 이현세 작품의 키워드는 “비극적인 영웅 오혜성”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명에 농락당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쓸쓸히 죽어가는 영웅의 비극적인 모습에 대중들은 열광했고, “공포의 외인구단”부터 “남벌”에 이르기까지 이현세의 분신인 ‘까치’ 오혜성은, 그 비범한 능력과 압도적인 카리스마에도 불구하고, 이현세의 힛트작에서는 한 번도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했다. 어느 평론가가 “이현세는 모든 작품들이 굵직한 선이며 남성적인 만화다. 영웅적이며 미학적이다. 그에 반해 허영만은 선은 흐릿하게 세밀한 묘사를 하고 서민적이며, 영웅은 없고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어있다.” 라고 평한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아주 정확한 평이라 여겨진다. 그만큼 이현세의 작품에서 “영웅”은 빼놓을 수 없는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춤추는 애벌레”에서의 오혜성은 그간의 영웅적인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독자들을 얼떨떨하게 만든다. 물론 능력적으로는 영웅의 면모를 어느 정도 갖추었다. 최고의 명문대학 법정대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있고, 유도 3단의 무술 실력에, 빼어난 외모와 화려한 화술로 여자들을 후리고 다니는 카사노바다. 하지만 이 작품 속의 오혜성에게는 비극적인 운명이나 꼭 이루어야만 할 과업이 없다. 이대로 수석으로 졸업해서 외무고시에 합격, 외교관이 되어 세계 각국의 미녀들을 만나러 가겠다는 가벼운 소망이 있을 뿐이다. 그런 오혜성에게 자신을 둘러싼 “어떤” 거대한 음모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진행되고, 이로 인해 오혜성은 인생의 지도를 바꾸어야하는 위기에 빠진다. 작품은 이때부터 이현세답지 않은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살인 누명을 벗기 위해 친구인 백두산과 함께 전대협 의장 마동탁을 찾아다니는 오혜성은 공장에 위장취업해서 노조 위원장 선거에 나가기도 하고, ‘껌팔이 조직’과 함께 ‘여자 장사’에 개입하기도 하고, 국회위원에 나가려는 사업가를 등쳐먹기도 한다. “춤추는 애벌레”에서 이현세는, 오혜성의 행보를 통해 세상의 음과 양을 모두 들쑤시며, 80년대 후반의 한국사회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데, 정치적으로 좌나 우 어느 쪽도 아닌 애매한 위치의 오혜성에게 1989년의 서울 풍경은 말 그대로 ‘요지경’ 속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줄곧 로드무비 형식의 풍자 코미디로 작품을 진행시켜나가다가 마지막에 주인공 모두를 어처구니없이 죽여 버리는 이현세 식의 독특한 허무주의였다. 어떤 이유에서 이현세가 이런 결말을 택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무언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결말을 원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외에 다른 뜻이 있다면 당시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세상 그 자체’에 대한 허무주의가 아니었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