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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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량의 상자

“이 세상엔 말이지, 이상한 일 따윈 무엇 하나 없다네, 세키구치” 소설가 쿄고쿠 나츠히코가 창조해낸 “안락의자형 탐정” 쿄고쿠도(본명 추젠지 아키히코)가 초자연적인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추리 소설 “망량의 상자” 코믹스판이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쿄고쿠도 시리...

2010-09-30 유호연
“이 세상엔 말이지, 이상한 일 따윈 무엇 하나 없다네, 세키구치” 소설가 쿄고쿠 나츠히코가 창조해낸 “안락의자형 탐정” 쿄고쿠도(본명 추젠지 아키히코)가 초자연적인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추리 소설 “망량의 상자” 코믹스판이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쿄고쿠도 시리즈”라 이름 붙은 이 추리 소설 시리즈는, 아직 과학과 합리가 완전히 도착하지 않은 시대를 미스터리 호러의 배경으로 삼아, 현재 총 9편이 발표되었으나 국내에는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 “광골의 꿈” 3편만이 출간되었다. 에노키즈를 주인공으로 한 외전 시리즈 “백기도연대”도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 “쿄고쿠도”는 주인공인 추젠지 아키히코의 별명이다. 고서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신사의 제사를 관장하는 음양사이나, 양자역학 등 최신 과학 이론에도 밝다. 특히 설화나 민담에는 민속학자를 능가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어 저주로 포장된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는 데 능하다. 소설을 쓰는 소심한 작가 세키구치가 쿄고쿠도의 곁에서 왓슨 노릇을 맡고 있으며, 사람의 기억을 읽는 초능력 탐정 에노키즈가 조력자이자 라이벌로 활약한다. “알고 있는 것과 알 수 있는 것은 별개야.” “안락의자형 탐정”이란,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고 단서를 수집하는 등 ‘발로 뛰는’ 고전적 탐정들과 달리,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머리로만’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들을 말한다. 그들은 해박한 지식과 논리적인 사고력으로 사건을 재조합하여 앉은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한다. “안락의자형 탐정”들의 뛰어난 통찰력은 진범을 지목하기에 앞서, 드러나지 않았어야 할 비밀이나 법으로는 처단할 수 없는 악행까지 간파해 버리고 마는데, “안락의자형 탐정”들이 등장하는 추리소설들이 요즘 인기가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쿄고쿠도” 역시 전형적인 “안락의자형 탐정”이다. 시니컬한 분위기의 이 남자는 침울한 삼류 소설가 세키구치가 어디선가 세상에 떠도는 풍문을 물어오면, ‘안락의자형 탐정’답게 앉은 자리에서 모든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시원스레 해결한다. “세상에 이상한 일 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잘라 말하며, 초자연적 세계와 현상을 과학과 철학, 역사적 맥락을 통해 설명하고, 화해 불가능한 두 세계관 사이에서 실종된 인간 본연의 모습과 그 억울함을 수복하고 매개한다. 그의 부업이 음양사인 것은 그런 맥락에서 자연스러운 설정이다. “아니, 그 이전에 자네는 그 문제에 맞서 영감 운운하는 것과 점술의 차이를 이해해야만 할 걸세, 종교와 초능력까지 한 데 묶어서 취급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더욱 수상하게 여겨지는 거야. 정리해보면 간단해, 임시로 종교인, 영능력자, 점술가, 초능력자 이렇게 네 종류로 나눠보겠네, 정확히 말하기에는 장르의 레벨이 다르기 때문에 구성원의 짜임새가 묘하지만 말야, 점술가는 직업명이고 영능력자와 초능력자는 개인이 가진 특이성을 나타내는 말일세, 종교를 가진 초능력 점술가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한 가지로만 나눌 순 없어, 하지만 어떤 한 가지 사항으로 좁혀서 논한다면 이렇게 분류하는 게 맞아, 그들이 비판받고 사람들이 혼동하는 가장 큰 원인...즉 ‘기적’이지.” 이 시리즈의 전작 “우부메의 여름”에 이어 “망량의 상자”에서도 쿄고쿠도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를 찾아온 소설가 세키구치, 삼류잡지기자 토리구치, 초능력 탐정 에노키즈, 형사인 키바가 각자 겪은 일을 이야기하고, 그는 그저 듣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모두가 알고 있는 정보에서 그 이상의 정보를 얻고, 사건의 본질을 파악한다. 하지만 그는 결코 쉽게 사건의 본질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언뜻 사건과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초능력자와 영능력자와 점술사와 종교가의 차이’ 나 ‘토막 살인을 저지르는 용의자의 심리’ 따위의 장광설을 추리소설 단편 하나에 맞먹을 정도의 페이지 동안 주절주절 떠들어댈 뿐이다. 하지만 사건이 풀려나가면서 그들은 알게 된다. 그가 어째서 별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그토록 집요하게 되풀이했어야 하는지, 그리고 ‘알고’ 보는 사실과 ‘모르고’ 보는 사실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지를 말이다. “초능력의 존재를 실험으로 증명하려는 시도에 대해 대중은 색안경을 끼고 비판했고 매스컴은 그걸 선동했어, 그 결과...무고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네... 전부 무지에서 온 결과일세, 자...이제 말해보게. 토리구치 군, 자네의 상대는 어느 쪽이지?”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04.26 ~ 1951.04.29)은, “세계는 설명할 수 없는 것과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나뉜다. 따라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쿄고쿠도는 설명하기 힘든 비일상적인 것들,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과학과 역사, 철학들을 활용해 신랄하게 파헤친다. 사건의 본질인 ‘그 무엇’을 은폐하기 위해, 언뜻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라는 “속임수”로 포장되어 있다는 것이, 사건을 대하는 그의 신조이자 해결방식이기도 하다. “망량의 상자”는 이런 쿄고쿠도의 관점에서 사건을 풀어나가면서 독자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탄탄한 원작을 만화로 바꾼 것이기 때문에 작품의 재미는 보장되어 있다. 같은 원작의 동명의 애니메이션도 팬들에게 호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