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때? 금배지 한 번 달아보고 싶은 생각 없어? 당선은 내가 보장하겠다.” 허영만의 냉소적인 허무주의가 인상적인 빛을 발하는 정치극화 “닭목을 비틀면 새벽은 안온다”는, 어느 정치인의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유명한 말을, 제목부터 정면으로 부정한 만화다. 허영만의 냉소적인 허무주의는 30년이 넘는 그의 작품행보 중, 중기작들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담배 한 개비”나, “벽” 등의 작품이다. 권투에 미쳐 세상을 등지고, 못다 이룬 자신의 꿈을 아들이 대신해주길 바라는 한 남자의 고난기 “담배 한 개비”는, 어린 아들을 학대하는 충격적인 전개와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애잔한 드라마, 묵직한 슬픔을 전해주는 결말까지 그야말로 허영만의 “허무주의”가 최고의 빛을 발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세상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재벌 후계자가 한 여자와의 사랑을 계기로 서서히 변해가고, 사랑을 잃은 후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능가하는 냉혈한 기업가로 변해가는 과정을 담은 “벽”도, “담배 한 개비”에 필적하는 “냉소적인 허무주의”를 내포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벗 삼을 사람은 나 하나뿐, 결국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믿지 말라는 뜻인가?” 1994년 作 “닭목을 비틀면 새벽은 안온다”는, ‘스포츠조선’에 연재되었던 정치극화로, 죽마고우였던 네 명의 남자들의 비틀린 운명을, ‘정치권력’이라는 거대한 틀에 집어넣어, 드라마틱하게 풀어낸 수작(秀作)이다. 죽마고우인 신석기, 이각기, 김희중, 김명인에게는 고등학생 시절 넷이서 저지른 원죄(原罪)가 있다. 명인의 여동생 소연을 강간한 동네 양아치를 산 속으로 납치, 린치를 가하다 죽여 버린 사건이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놀란 친구들을 보면서, 소연의 오빠이기도 한 명인은 나머지 친구들의 죄를 혼자서 뒤집어쓰고 옥살이를 한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후에도 이 원죄(原罪)는 나머지 셋을 괴롭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소연을 사랑했던 석기와 희중에게 커다란 부담감이자 인생의 어두움으로 작용한다. 이 뒤틀린 운명은, 네 친구가 모두 사회인이 된 시점에서부터 새롭게 엮여지는, 사건의 중심축으로 작용한다. ‘차기 대통령’이라 불리는 야당의 부총재, 이진우의 외동아들인 각기는 전 국민의 인기를 얻고 있는 다큐멘터리 방송 진행자 신석기를 부산의 보궐선거에 출마시킨다. 그 과정에서 예전의 친구들이 다시 뭉치게 되는데, 김희중은 소설가, 김명인은 조직 폭력배가 되어 있었다. 신석기의 드라마틱한 당선 이후, 이들 넷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희중은 갑자기 사라져버린 소연이의 행방을 추적하고, 소연의 비밀을 알고 있는 석기는 이진우 계파의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남몰래 복수를 꿈꾼다. 한편 조직 폭력배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명인은 이진우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세력을 일본까지 확장시키고, 이진우의 아들인 각기는 자신의 차기 출마를 꿈꾸며 아버지의 대통령 후보 경선을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더러운 얘기를 하면 입도 더러워진다. 그보단 신문기자에게 적당히 소스를 흘리는 게 낫겠지, 적당히 촌지 좀 건네주고,”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은, 1993년 2월부터 1998년 2월까지 대한민국의 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이 야당 총재시절 군사정권의 탄압에 맞서 내지른 일갈(一喝)이다. “닭목을 비틀면 새벽은 안온다”가 스포츠 조선에 연재되던 시기가 김영삼의 임기 중이었다는 사실은 독자에게 아이러니컬한 느낌을 전해준다. “닭목을 비틀면 새벽은 안온다”에서 허영만은, 여야를 막론하고 복마전(伏魔殿)이라 불리고 있는, 정치판에 만연한 권모술수와 음모를 드라마틱하게 엮어, 권력의 추악한 속성과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네가 당선됨으로 해서 민국당내 주류, 비주류의 비례는 40:48이 됐다. 그 중 우리 계보에 속하는 사람이 현재 22명, 차기 대권 주자는 경선으로 선출한다. 그래야 국민들 보기에도 떳떳하고 우리들에게도 유리하다. 다음 대선까지는 2년 남짓, 지금부터 분위기를 그렇게 몰고 가야 해, 벌써부터 우선 물밑작업으로 주류와 비주류를 막론하고 다른 계파 의원들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작업을 하고 있지, 이게 그 대상자들 명단이다. 가능한 한 친하게 사귀어 둬.” “닭목을 비틀면 새벽은 안온다”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초반의 잘 짜여진 설정과 중반의 현실감 넘치는 현장 묘사를, 작품의 후반으로 치달을수록 너무 ‘만화적으로’ 바꾸어간데 있다. 작가의 의도인지, 편집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극 초반과 중반에 매우 탄탄한 구조를 갖고 있던 리얼한 드라마가 후반에는 거의 갱영화 수준으로 전락해 간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진우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결정적 증거를 확보한 신석기가 ‘자살을 가장한 타살’로 처리되는 결말은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지만, 이 결말에 다다르기 직전까지 극 후반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음모’에 의해 살해되기 때문에, 현실감이 떨어지고 강렬함이 밍밍하게 희석되어 버린다. 물론, 만화는 만화다. 어디까지나 허구의 이야기이고, 허구에 상상력의 기반을 두고 있는 장르다. 하지만 다른 작가들과 다르게 허영만의 장점은, 그 상상력의 기반을 가장 현실적인 것에서부터 끌어왔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닭목을 비틀면 새벽은 안온다”에서 가장 큰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너무나 좋았던 초반, 중반에 비해 후반부분을 너무 ‘허구스럽게’ 처리했다는 것이다. “냉소적인 허무주의”가 부각되는 것도 좋지만, 그 강렬한 결말을 위해 조금은 더 리얼하게 사건을 전개시켜주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조심스러운 아쉬움을 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