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이봐, 네 장작과 물, 그리고 흙을 빌려가겠어.” “해수의 아이”, “마녀”, “리틀 포레스트” 등의 한국어판이 출간되어 우리나라에도 자신만의 텃밭을 착실히 가꾸어 가고 있는, 일본의 ‘천재’작가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단편집 “영혼”은 총 여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
2010-09-15
김현우
“이봐, 네 장작과 물, 그리고 흙을 빌려가겠어.” “해수의 아이”, “마녀”, “리틀 포레스트” 등의 한국어판이 출간되어 우리나라에도 자신만의 텃밭을 착실히 가꾸어 가고 있는, 일본의 ‘천재’작가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단편집 “영혼”은 총 여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직 남아 있던 새끼 새의 온기가 사라져 가고 점점 싸늘하게 굳어간다. 마치 내 손바닥이 새끼 새의 목숨을 빨아들이고 있는 듯한 상념에 사로잡혔다.”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첫 번째 강점은, 역시 ‘그림’이다. “마녀”같은 경우는 모든 것을 볼펜으로만 그렸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작가는 정말 천재다. 총 두 권으로 이루어진 “마녀”를 읽어보면 그 엄청난 밀도의 작화수준에 일단 압도되는데, 배경, 인물, 효과까지 모든 것을 볼펜으로만 이루어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이 지면을 통해 독자들의 눈앞에 펼쳐진다. “이건 영혼의 미약이야, 이 달콤한 냄새가 혼을 끌어당기지, 마음 속 깊은 곳에 잠든 기억을 깨우고 꿈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해, 그리고 네게 빙의된, 지금은 네 몸 깊은 곳에 숨어있는 그 영도...언젠가는 이 향기에 이끌려 떠오르게 될 거야...” 단편집 “영혼”에서도 이 작가의 밀도감 넘치는 작화는 유감없이 발휘된다. 만화는 ‘글과 그림이 결합된 이야기’다. 하지만 그 중에서 그림이 차지하는 비중은 80%를 넘을 것이다. 독자들에게 압도적인 비주얼을 선사한다는 것만으로도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역량은 훌륭하다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있잖아 마키, 몸이 살아가길 원하기 때문에....살아갈 힘이 남아 있는 한 배는 고프기 마련이란다. 무슨 일이 일어나건, 밥을 먹을 수 있는 동안은 괜찮아.”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두 번째 강점은, 독특한 세계관이다. 2004년 作 “마녀”나 요즘 연재하고 있는 “해수의 아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이가라시 다이스케는 현실과 비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만의 신비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마치 작가의 몽상처럼 느껴지는 비현실적인 설정과 세상의 차가움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현실의 배경은, 이가라시의 손에 의해 교차적으로 편집되고 한 공간에 존재함으로써 매우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같은 공간에 존재할 수 없는 두 개의 이질적인 형상들은, 언뜻 보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난제처럼 독자에게 다가오지만, 작가는 현실과 환상간의 미묘한 교차 속에서 세계의 비밀 한 조각을 살며시 끼워놓는다. 그가 발견해낸 세상의 비밀은, 우리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 즉 아직까지 인류가 밝혀내지 못한 미스터리한 현상들이, 왜,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그럴듯하고 설득력 있는 상상이다. 이렇게 세상의 비밀을 꿰뚫는 직관력을 보여줄 때 마다 이가라시 다이스케는 작가이기 보단 철학자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곤 한다. “봐라! 어떠냐! 내 신력(神力)은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을 구하는데도 쓸 수 있다.” 첫 번째 단편 “향토신”은, 아주 짧은 컬러원고로 주간 “모닝” 독자선물용으로 그린 것이라 한다. 모닝에서 특별 제작한, 태양을 모티브로 한 도자기가 주제로 야나기타 쿠니오의 “토노 이야기” 풍으로 구성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물고기가 꾼 꿈입니다.” 두 번째 단편 “영혼”은,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첫 스토리 만화라고 한다.(작가 후기), 월간 ‘애프터눈’ 1998년 5월호에 게재된 이 단편은, 소녀가 밟아 죽인 새끼 새의 영혼이 소녀의 몸속에 빙의되어 벌어지는 신비로운 이야기로,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특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수작(秀作)이다. 특히 맨 마지막 장면에서 날아가는 새의 기묘한 얼굴이 클로즈업된 컷은 기묘한 여운을 독자에게 선사할 것이다. “그 모래...나한테서 나온 거거든요.” 세 번째 단편 “곰잡이 신도둑 타로의 눈물”은, “영혼”에서 도시의 풍경을 너무 많이 그렸기 때문에 산의 풍경을 너무나 그리고 싶어 시작한 작품이라고 한다. 월간 ‘애프터눈’ 1999년 6월호에 게재된 이 단편은, 마치 일본의 토속신화를 연상하게 하는 이야기로, 신력(神力)을 지닌 소년 타로와 산신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소녀 쿠미코가 산신을 속이려는 사제들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다이내믹한 느낌의 ‘탈출기(脫出記)’다. “빛처럼 보였다. 그를 지키려는 듯이 ‘빛’이 이토 아저씨를 에워싼다.” 네 번째 단편 “모래 여자”는, 월간 ‘애프터눈’ 2000년 8월호에 게재된 단편으로 몸에서 끊임없이 모래가 솟아나오는 신비한 여자와 그녀를 지켜주는 화가, 우연한 계기로 그들과 동거하게 된 가출소녀가 겪는, 애잔한 느낌의 러브스토리다. 개인적으로 제일 마음에 들었다. “맛있는 빵을 만드는 요령, 반죽을 만들 때 소녀의 피부 같은 탄력을 가지게 할 것.” 다섯 번째 단편 “le pain et le chat”은, 월간 ‘애프터눈’ 2002년 6월호에 게재된 것으로 어느 성실한 제빵사와 부모를 기다리며 홀로 살아가는 소녀의 이야기다.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 소녀가 병을 앓으면서까지 고양이를 놓지 않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모습이 인상적인, 아름답고 신비한 느낌의 단편이다. “봄의 양분이 되는 것을 영예롭게 생각하거라.” 여섯 번째 단편 “여전히 겨울”은,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데뷔작이라고 한다. ‘애프터눈 사계상’ 1993년 고단샤 겨울 콘테스트 사계대상 수상작품으로 잡지에는 미수록 된 것을 단행본으로 묶을 때 일부 수정하여 삽입한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