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수상한 연립주택

“세입자와 관계가 틀어져 주변에 안 좋게 소문이 나면 좋을 게 없습니다. 나중에 집을 다시 팔 때도 문제가 되니 슬슬 달래가는 척하다가 기회를 엿보세요! 이미 칼자루는 사장님이 쥐고 계신데 뭘 그리 조급해하십니까.” 2009년 대한민국을 가장 뜨겁게 달군 사회적 ...

2010-09-15 유호연
“세입자와 관계가 틀어져 주변에 안 좋게 소문이 나면 좋을 게 없습니다. 나중에 집을 다시 팔 때도 문제가 되니 슬슬 달래가는 척하다가 기회를 엿보세요! 이미 칼자루는 사장님이 쥐고 계신데 뭘 그리 조급해하십니까.” 2009년 대한민국을 가장 뜨겁게 달군 사회적 이슈 중 하나는 ‘용산 철거민 참사’였다. “용산4구역 철거 현장 화재 사건”, 일명 ‘용산참사’라 불리는 이 사건은, 2009년 1월 20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건물 옥상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 경찰, 용역 직원들 간의 충돌이 벌어지는 가운데 발생한 화재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하고 23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신은 인간에게 두 개의 팔을 주셨죠, 그건 누군가 힘들고 어려울 때 두 팔을 벌려 위로하라는 배려의 의미가 아닐까요.” 이 끔찍한 사고가 벌어진지 근 1년여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지만, 사건은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2009년 대한민국의 모든 사회문제를 이 사고 안에 압축해 놓은 듯한 모양새로 양측의 대립은 격화되어만 가고 있다. 이 사고의 모든 쟁점을 다 차치하고서라도, ‘왜 그들은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 하는 인간적인 시선으로 다가가보면, 사고의 원인은 아주 분명해지고, 그 시작이 그저 ‘누군가의 개발이익’이라는 ‘돈’ 문제 때문에 불거져 나왔다는 것에 분노하게 된다. 도대체 왜 우리는, 선진국의 상징이라 불리는 OECD 가입국가 대한민국의 수도, 21세기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일을 겪어야만 하는 걸까? ‘돈’ 이외에는 그 어떤 가치도 다 무너져버린 이 암울하고 천박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어떻게 쉽게 가는 인생이 하나도 없냐.” 오영진의 “수상한 연립주택”은, ‘재개발’을 둘러싼 연립주택 주민들의 예민하면서도 싸늘한 이야기를, 풍자와 웃음의 코드를 통해 씁쓸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의 초판 1쇄 발간 시점이 2008년 12월 12일이고, 용산 참사가 2009년 1월 20일 새벽에 일어났으니, 이 작품에서 묘사된 건물주 김팔봉의 죽음이, 마치 용산 참사를 예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한 순간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면서 섬찟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더더욱 씁쓸한 것은 만화에서는 건물주가 자신의 음모에 오히려 덜미를 잡혀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현실에서는 경찰관 1명과 철거민 5명이 화염에 휩싸여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법이 생활의 한 부분이 될지는 몰라도 사람 사는 건 순리대로 살아야죠.” ‘아파트는 고사하고 서울 변두리에 우리 식구 발 뻗고 맘 편히 잘 수 있는 이 비좁은 공간마저 재개발이라는 황금딱지를 보고 몰려드는 총알 두둑한 엘도라도 행 총잡이들에게 점령당하고 있다.’라는, 이 작품의 창작동기에 대한 담담한 술회를 작가의 말을 통해 밝히고 있는 오영진은, ‘서울시 은평구 황금동 338-8번지 오래된 연립주택’에 사는 주민들을 통해 ‘대한민국 부동산’을 둘러싼 수상하면서도 씁쓸한 현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희망도 숨어버린 이 낡은 동네에 재개발의 꽃바람이 불어옵니다. 경축드립니다.” “수상한 연립주택”은 만화 내용 그대로 한 편의 특집 드라마로 만들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극적 구성과 연출, 스토리와 캐릭터가 완벽히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다. 이야기가 결말로 흘러가는 시간 축을 따라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가는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되면서, 독자들은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전개과정에서 작가가 요소요소에 박아 넣은, 독자들의 웃음을 유발하는 풍자적인 개그코드는 작가의 진솔한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하면서도 극적인 재미를 배가시키는 시너지 효과를 낳는다. 탁월한 기,승,전의 과정을 거쳐 김팔봉의 죽음이 묘사되는 결말 부문에 이르면, 자신의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그의 죽음을 ‘남의 일’이라고 외면하는 세입자들의 모습을 통해, ‘돈’ 또는 ‘이익’앞에서 잔인해지는 ‘인간의 추악한 이기심’을 강력한 전달효과로 독자들에게 각인시킨다. “누나, 세상의 음모란 음모는 다 이 법속에 있는 거 몰라?” ‘개발이익’만 생각하는 주인과, 그저 하루하루의 생존에만 매달리는 세입자들의 실상이, 작가의 풍자를 통해 개그적인 재미로 결합되어 희화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남기는 씁쓸한 여운은 사람의 마음을 매우 무겁게 만든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은 몇몇 장면들이 있었는데, 세입자 오공식을 두들겨 패 땅바닥에 패대기친 건물주 김팔봉이 ‘황금동 재개발 뉴타운 확정’이라는 플래카드를 보면서 ‘만세!’라고 외치며 두 팔을 번쩍 드는 95페이지의 컷과 주차요원으로 일하던 오공식이 손님의 외제차에 흠집을 내면서 사장에게 귀싸대기를 맞고 사죄한 후 비 맞으며 자학하는 장면이다. 인생의 이면에 담긴 ‘삶의 진실’을 여과 없이 느끼게 해주는 이 씁쓸한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왜 사냐? 차 한 대 값도 못 버는 인생을.” ‘주변에서 온갖 구린내, 슬픈 내음은 다 풍기는데 조용히 산다는 것, 평범하게 산다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다.’는 작가의 말은,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마천루에 살면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몇몇 혜택 받은 소수의 인생들을 빼놓고는,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내 옆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살아, 조용히... 평범하게...’ 이 비굴한 삶의 태도가 언젠가부터 처세의 진리가 되어버린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왜 사냐? 차 한 대 값도 못 버는 인생을”이라고, 뇌까리는 오공식의 독백은, 읽는 이에게 씁쓸한 자괴감과 박탈감을 던져준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이익에 휘둘리지 않고, 나보다 어려운 타인을 위해 나서서 도와주진 못하더라도 기도는 해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정녕 바보 같고 손해만 보는 인생일까? 용산의 불구덩이 속에서 비명에 가신,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