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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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얼굴

“하리, 모리, 그리고 후사꼬 듣거라, 19년 동안 감추어 왔던 비밀을 털어 놓겠다. 너희들 어머니가 첫 아기를 낳을 때쯤, 건강한 아기를 낳게 해 달라고 오사카 부근의 미야노 절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절 입구에 강보에 싸인 채 버려져 울고 있는 아기가 있어 데려와...

2010-09-09 석재정
“하리, 모리, 그리고 후사꼬 듣거라, 19년 동안 감추어 왔던 비밀을 털어 놓겠다. 너희들 어머니가 첫 아기를 낳을 때쯤, 건강한 아기를 낳게 해 달라고 오사카 부근의 미야노 절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절 입구에 강보에 싸인 채 버려져 울고 있는 아기가 있어 데려와 같이 키웠다. 그 아이 이름이 김상훈이라는 한국인이었는데, 다름 아닌 하리, 바로 너였던 것이다. 증거는 테이프 밑의 봉투에 담겨져 있다.” 한국 만화계의 최고봉에 올라있는 작가 허영만, 47년생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발표하는 작품마다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원작으로 활용되고 있는 한국만화계의 “힛트 제조기”, 이현세와 더불어 한국 만화계의 “극화장르”를 탄탄하게 정립시킨 그에게도 음지의 세월이 있었다. 허영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때 한국에서 만화라는 장르는 책의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서점에서 독자들과 만나지 못한 시절이 존재했다. 이 시절의 만화책들은 ‘청소년 유해도서’로 규정되어 거리에서 화형을 당하기도 했으며, 어두침침한 만화방 구석에서 폐쇄된 유통경로를 통해 한정된 독자들과 만나야 했었다. 그러나 허영만을 비롯한 이현세, 이두호, 이진주, 김수정, 김혜린, 황미나, 원수연, 강경옥 등의 뛰어난 작가들에 의해,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갖춘 수작(秀作)들이 꾸준히 발표되면서, 만화는 서서히 음지에서 양지로 부상해, 21세기인 지금엔 미래 산업의 핵심동력 중 하나로까지 불리며 사회적인 위상을 갖췄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 만화사를 짚어볼 때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은 대부분, 작가들이 암울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하는 ‘대본소 시기’에 등장했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 그랬고, 고우영의 “삼국지”가 그랬으며, 허영만의 “오! 한강”이 그랬다. 90년대 들어 여러 종류의 만화잡지가 창간되고, 작가들은 또 다른 영역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튜디오’라 불리는 만화공장 시스템을 폐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많은 작가들이 대본소를 통해 유통시키는 ‘공장만화’와 대여점을 통해 유통시키는 ‘잡지연재만화’를 동시에 제작했으며, 1세대 작가들의 뒤를 잇는 수많은 신인작가들이 잡지를 통해 등장해, 아마도 90년대 초반은 한국만화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수의, 양질의 작품들이 창작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1967년 6월 오사카의 시장에서 한국인 상인들과 일본인 폭력단과의 이권 다툼이 치열해져 매일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생명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상훈이 하나만이라도 살리자는 생각으로 부근의 절에 갔었다. 멀리서 젊은 부인과 노인이 오는 걸 보고 상훈이를 눈에 띄는 곳에 버렸고 그 두 사람이 안고 가는 것을 확인한 뒤, 한없이 울면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19년이 흘러 버린 것이다.” 허영만은 1974년 “집을 찾아서”로 데뷔한 이후, “각시탈”(1975), “무당거미”(1981), “카멜레온의 시”(1986), “고독한 기타맨”(1987), “오! 한강”(1987), “벽”(1988), “48+1” (1989), “미스터 손”(1989), “아스팔트 사나이”(1992), “비트”(1994), “세일즈맨”(1994), “미스터 Q”(1994), “사랑해”(1999), “타짜”(1999), “식객”(2002~) 등 수많은 명작들을 만들어낸 한국 최고의 만화가다. 그러나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진 않았어도, 만화에 관심 있는 3~40대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허영만의 “대본소 명작”들은 정말 많다. “들개이빨”, “겨울로 가는 복서”, “오늘은 마요일”, “담배 한 개비”, “황금충”, “퇴역전선”, “블랙홀”, “화이트홀”, “금간종”, “청동미르”, “2시간 10분”, “굿바이 아메리카” 등등 자료를 찾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당시 만화방을 찾은 독자들에게 수많은 감동과 여운을 남긴 허영만의 명작들이다.(이외에도 수도 없이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여기에선 이 정도 소개에 그치기로 한다) 여기에 소개하는 “두 얼굴”은, 1987년에 초판이 발행된 허영만의 초기작 중 하나다.(어떤 자료에서는 1984년으로 되어있는데 정확한 시기를 모르겠다) 기구한 운명으로 갈라서야 했던 형제의 이야기로, 마지막 장면이 애잔한 여운을 남기는 3권짜리 단행본이다. 키시와다라는 조그만 어촌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3남매, 하리, 모리, 후사꼬는 어느 날 사고로 갑작스럽게 할아버지를 잃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일본기업 랭킹 9위의 자동차 회사 월드 모터즈의 회장 나가시마 시게오(한국명 김태일)가 애타게 찾아 헤매는 잃어버린 아들이 둘째인 모리였다는 것이다. 결국 소식을 접한 김태일 회장은 직접 키시와다로 날아와 모리를 만나고, 하리의 도움으로 모리를 아들로 맞아 데리고 가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할아버지의 임종을 홀로 지켜 본 모리가 유언이 녹음된 테이프를 조작, 자신의 출생성분을 위조한 것으로 김태일 회장의 친아들은 첫째인 하리다. 그러나 이 사실은 모리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고, 모리는 자신의 비밀을 숨긴 채 월드모터즈의 후계자이자 재일교포 2세인 김상훈으로 살아간다. 김태일 회장의 친아들인 하리는, 자신에 관한 진실도 모른 채 의식적으로 모리를 피하면서, 대학진학을 위해 후사꼬만 모리에게 보낸 후,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유로운 어부로서 살아간다. 그러나 엇갈린 운명은 그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두 얼굴”은, 허영만 특유의 허무주의적인 정서가 작품 전반에 깊게 배어있는 작품으로, 극 초반의 치밀한 긴장감을 인상 깊은 결말로 이끄는, 탁월한 드라마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작품의 마지막에서 장애인이 된 하리가 아버지와 함께 숨어서 모리의 결혼식을 지켜보며 숨겨진 진실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읽는 이에게 뭐라 설명하기 힘든, 씁쓸하고 애잔한 여운을 남겨주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만화를 사랑하는 한국인으로서 정말 바라는 것은, 허영만의 모든 작품이 책으로 다시 한 번 출간되는 것이다. “허영만 전집”을 기획하는 출판사는 정녕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민간에서 안 된다면 정부에서라도 시행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