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붙여 작품의 마지막을 보면, 민중의 움직임을 불씨에 비유한 장면이 나온다. 거기에 들어간 효과음이 우리 가락 ‘덩더꿍’이다. 의도하지 않고 쓴 제목이지만, 무의식중에 그 느낌에 끌렸던 것일까, 아무튼 그 가락에 춤을 추듯, 일렁이는 불씨 즉 민중의 의지가 마침내 춤을 추는 것이다. 이렇듯 현실에서 혹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에는 권선징악을, 짓밟혀온 민초들에 의한 정의실현을 그려내고 싶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한국만화계의 큰 기둥으로 불리며, 작품의 면면에 흐르는 ‘들풀들의 시대정신’을 뚝심 넘치는 선으로 40년이 넘도록 일관되게 표현해온 작가 이두호, 그의 주인공 독대는 민초들의 회한을 온 몸에 품고 짓밟혀도, 쓰러져도 잡초처럼 일어서며 바람에 맞서 꿋꿋하게 걸어가는, 말 그대로 ‘민중의 아이콘’이다. 이두호, ‘한국 만화’는 이 꿋꿋한 노작가를 빼놓고는 ‘역사’를 얘기할 수 없다.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가 세상에 내놓은 명작들의 위상도 위상이지만, 만화라는 예술장르가 대중과 만나 어떤 식으로 그 생명력을 갖게 되는지를 몸소 보여준 작가이기 때문이다. “덩더꿍”, “객주”, “임꺽정” 등 그의 이름과 동일시되는 그의 명작들은, 그 안에 담고 있는 이야기들의 역사를 통해 증명된 진실성, 즉 ‘진리(眞理)’의 무게만으로도, 한국 만화계가 세상에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적 유산이다. 그가 긴 세월동안 작가로서 일관되게 표현해 온 것은, 역사를 통해 증명된 한국인의 근간이 되는 정서이자, 사람의 삶이라는 개개인의 역사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정서다. 그것은 ‘한(恨)’이라 부를 수도 있고 ‘정(情)’이라 부를 수도 있지만, 무언가 글이나 말로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자리 잡은, 뜨겁고 단단한, 공통의 ‘의지(意志)’같은 것이다. 이두호는, 사람들 가슴 속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이 공통된 ‘의지’를, 한국적이면서도 토속적인 언어와 힘이 넘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애잔한 그림으로, 걸쭉하고 뜨겁게 표현해 왔으며,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이라면 외면할 수 없는 그 어떤 매력이, 그의 대표작들 안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이라고 난 생각한다. “덩더꿍”은 지금은 없어진 전설의 잡지 ‘주간만화’에 1987년부터 연제된 작품이다. 이런 내용의 만화를 그 시대에 연재했었다는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덩더꿍”은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내용을 그 안에 담고 있는 뜨거운 만화다. (10년 만에 돌아왔다는 권세를 등에 업고 요즘 온 세상에 말도 안 되는 난리를 치고 다니는 수구꼴통들이 이 작품을 읽었으면, 아마 ‘좌빨’이네, ‘선동’이네, ‘빨갱이’네 뭐네 하면서 분서갱유하라고 난리칠 작품일 것이다) 주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민중의 분노와 의지, 쓸쓸한 회한을 담고 있는 이두호의 작품은 “임꺽정”이나 “객주”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덩더꿍”이 새롭게 조명 받아야 하는 이유는, 오랜만에 찾아온 암흑의 시대를 2009년의 대한민국 민중들이 온몸으로 힘겹게 겪고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들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열림원의 만화브랜드 ‘행복한 만화가게’에서 이두호의 “덩더꿍”을 2009년도 버전 세 권짜리 애장판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내놓았다. 이두호가 자신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만화’로 꼽는 작품인 “덩더꿍”은, 권력에 의해 짓눌린 민중들의 ‘분노’를 실감나게 묘사한 작품이자, 결국엔 ‘암살’이라는 형태로 권력자를 척살하는 파격적인 내용이며, 맨 마지막에서는 들불처럼 들고 일어서는 민중들의 의지를 감동적으로 표현해낸 혁명적인 만화다. “임꺽정”처럼 긴 호흡의 장편으로 가지 않고, 3권으로 깔끔하게 끝맺었기에 더더욱 빛나 보이는 “덩더꿍”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해 왔던, 권력에 기대어 민초들을 수탈하고 짓밟는 악질적인 탐관오리를 한 맺힌 어느 민초의 손으로 척살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면서도 현실감 넘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조선 세조 때를 배경으로, ‘비리 정치가이자 탐관오리’의 대표적인 인물로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홍윤성’과 그에게 짓밟힌 민초들의 삶을 소재로 이두호가 창작한 픽션이다. 극중 홍윤성의 모델인 ‘홍성윤’에게 삶의 모든 것을 빼앗긴 민초 ‘독대’의 집념어린 복수극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함으로써, 권력에 억눌린 민초들의 저항의지를 묵직하게 표현해 낸 명작으로, 특히나 참시된 독대의 시신을 수습하려는, 장민평과 방실이를 죽이려 달려드는 군인들의 앞을 막아서며 그들을 지켜주는 민초들이 서서히 봉기하는 모습을 한 편의 영화처럼 담아낸, 이 작품의 감동적인 대단원은 한국 만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감동적인 대단원뿐만 아니라, “덩더꿍”은 작가의 관록이 느껴지는 치밀한 극적 구성과 등장 인물 간의 갈등관계, 마치 예정되어 있었던 운명처럼 자연스럽게 엮어지는 감동적인 스토리만으로도 명작의 반열에 오를만한 작품이다. 이두호는 “덩더꿍”에서 어느 한 인물도 허투루 등장시키는 법챴럼 으며, 주인공인 독대와 연을 맺게 되는 모든 인물챴럼결국 홍성윤을 척살하는 과정 하나하나에 주춧돌을 놓아주는 역할을 소화하고 있어, 결말로 치달을수록 눈을 땔 수 없게 만드는 짜임새 있는 구성이 일품이다. 마치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덩더꿍”은,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만화를 그려온 작가가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고 말할만한 명작임에 틀림없다. 등장인물간의 개연성이나 드라마틱하고 치밀한 극적 구성만 훌륭한 것이 아니다. 이두호가 되도록이면 작품 속에서 편안하게 묘사하려 애쓰는, 이름 없는 수많은 인물들이 토속적인 언어로 세상사에 대해 얘기하는, 수많은 배경들은 결코 ‘배경’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권력에 줄을 대려고 한양으로 끝없이 뇌물을 올려 보내는 수많은 지방 토호들의 모습이라거나, ‘홍성윤’의 그늘에 빌붙어 민초들을 상대로 끊임없는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폭력배들의 모습은, 2009년의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어버렸다. 특히나 홍성윤이 칼잡이들을 동원해 지역의 인망 높은 유지 변좌수의 땅을 빼앗는 과정은, 마치 건설회사와 결탁한 부동산 개발업자가 정치권력에 로비를 해서, 말도 안 되는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고 엄청난 이윤을 남기는, 2009년 현재의 한국정부의 지역개발 정책과 무섭도록 닮아 있다. 아주 오래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두호의 “덩더꿍”이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민초들의 ‘삶의 축소판’처럼 보이는 것은, 여러 번 시대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기득권이나 권력자들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을 지탱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대다수의 권력을 갖지 못한 평범하고 성실한 민초들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를 되집어 보면 그런 대다수 민초들의 희생과 노동을 착취하며 자신의 배만 불렸던 한 줌도 안 되는 소수의 권력자들은 항상 있었다. 세상에서 정의(正義)나 법도라는 단어가 무색해질 정도로 어지러운 시기가 도래하면, 이런 한 줌의 무리들은 언제나 어김없이 등장해서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었고 저항하는 민중들을 무력으로 짓밟았다. 그러나 그들은 기억해야 한다. 무엇이든지 도를 넘으면 그릇이 깨지거나 물이 넘쳤다는 것을, 이두호가 ‘독대의 복수’를 통해 묘사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 장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는, 바로 “분노”다.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듯이, 민초들에게 ‘공통의 의지’가 발현되는 계기는, 억눌렸던 모든 분노를 일거에 발산하게 되는, 아주 사소해 보이는 사건이었다.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 사실을, 그 ‘분노’를.... 2009년의 끝자락에서도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권력의 그늘에 숨어 음험한 부(富)를 축적하고 있는 이들이여, 잊지 말기 바란다. 역사는 항상 반복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