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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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 딕2 (엔젤딕)

“악마는 변태를 시도하였다. 태초부터 스스로 가졌던 원형의 저주에 그...끝간데를 몰라 마침표를 찍을 수 없게 되어 버렸고 찰나적인 쉼표조차 자리할 수 없는 영원한 증오에 지쳐 버렸다. 그래서 악마는 전혀 그답지 못한 탈바꿈을 시도하였고 장장 반세기를 통한 각고의 인내...

2010-08-27 김진수
“악마는 변태를 시도하였다. 태초부터 스스로 가졌던 원형의 저주에 그...끝간데를 몰라 마침표를 찍을 수 없게 되어 버렸고 찰나적인 쉼표조차 자리할 수 없는 영원한 증오에 지쳐 버렸다. 그래서 악마는 전혀 그답지 못한 탈바꿈을 시도하였고 장장 반세기를 통한 각고의 인내와 처절한 변태기를 거쳐 환희의 탈피를 시도 하였으나 그 변태적 변태의 시도는 끝내...‘미완의 변태’로 남고 말았다.” 이현세의 1992년 作 “엔젤 딕”은, “블루엔젤”(1989)의 속편 격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전편에서 인상 깊은 활약을 펼친 여형사 하지란 경위가, 전편보다 좀 더 거대하고, 지능적이며, 사나운 범죄자들을 상대하는 이야기다. 전편인 “블루엔젤”이 사회의 어둡고 깊숙한 곳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리얼 스토리’ 형식의 작품이었다면, 속편인 “엔젤 딕”은 조금 더 만화다운 소재로, 하지란의 활약이 블록버스터 급으로 스케일이 커진, ‘업그레이드 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전편의 “리얼 스토리” 형식을 더 선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엔젤 딕”이 전편보다 작품성이 떨어진다거나 재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스토리나 연출 자체가 현실적인 문제보다는 허구적인 상상력에 더 기반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편인 “블루엔젤”의 마지막 에피소드 “정의의 사도”에서부터, 이 시리즈는 ‘블록버스터’로 변화할 조짐이 차츰 보이기 시작한다. 최면술을 이용해 자신의 복수를 대행하는 어느 최면술사의 이야기였던 “정의의 사도”에서, 하지란은 범인들의 초능력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도 최면술을 배워 그들의 괴력을 제압한다. 그때부터 하지란은 현실적인 형사의 모습에서 진정한 슈퍼우먼으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하지란의 팬으로서 이 변신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 “엔젤 시리즈”에서, “블루 엔젤”의 “아귀의 노래”에피소드라던가, “앙팡테리블” 같은 에피소드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내용이 지극히 현실적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이현세다운 전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엔젤 딕”에서는 현실적인 내용은 사라지고 “이현세다운” 전개만 강조되어 있다. 물론 제 2권에 등장하는 “꿈의 화원”같은 엽기 살인마에 관한 에피소드는 이제 대한민국에서도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역시 “엔젤 시리즈”의 묘미는, 사회에 상처받은 범죄자들을 한편으로는 이해하면서도, 경찰로서 그들을 제압해야만 하는 하지란의 내면적 고뇌가 핵심적인 정서이기 때문이다. 특히 탈옥수 강득수의 비극을 다룬 “아귀의 노래”나 선악의 구별이 애매모호한 청소년기에 “혈맹회”라는 써클을 만들어 세상의 악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 하는 오혜성의 이야기 “앙팡테리블”은 이현세가 아니면 잡아낼 수 없는 빛나는 감수성이었다고 생각한다. “엔젤 딕의 첫 번째 이야기인 이번 ‘미완의 변태’는 여태까지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것으로 다수의 이기에 의해 구제받을 수 없는 추악한 영혼으로 전락한 소수의 인간들이 처절한 변태를 시도하지만 결국은 그 변태의 소산마저 다수의 이기에 다시 이용될 수밖에 없는 미완의 이야기이다.” - 작가의 말 中에서 “엔젤 딕”은 총 3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1권에는 “미완의 변태”, 2권에는 “꿈의 화원”, 3권에는 “M16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1권에 해당하는 “미완의 변태”는 태평양 전쟁 때 생체실험으로 악명을 떨쳤던 일본군 731부대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해 현대의 한국에 접목시킨 이야기다. 이야기의 주된 스토리는 이렇다. 731부대에 협력한 한국인 과학자들 몇몇이 종전 후 몰래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일본의 죄악에 동참하고 동족을 마루타로 썼다는 자신들의 과오를 씻기 위해, ‘암’을 정복하자는 거대한 목표를 세우고 731부대에서의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 모처에서 실험을 시작한다. 이런 그들에게 거대 제약회사를 소유한 재벌 유형권 회장이 스폰서로 나서면서 이들의 또 다른 생체실험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동해안의 어떤 무인도에 최신식의 설비를 갖추고 자신들과 가족들에게 직접 암세포를 주사하며 생체실험을 해오던 그들에게 고비가 찾아오고, 해변에 떠내려온 그들의 기괴한 실험체를 하지란이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가능한 한 대립된 두 인간을 발가벗기기로 작정했으며 그것으로 우리들의 본성 속에서 잠자고 있는 마성을 최대한 끌어내려고 노력했고 증거를 남기지 않는 이 악마적인 유희를 과학적으로는 완전범죄가 될 수밖에 없도록 끌고 갔으며 단지 육감만으로 범죄의 현장에 도달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 작가의 말 中에서 2권에 실려 있는 “꿈의 화원”은, 인육을 먹는 지능적인 살인마와 하지란의 대결을 그린 에피소드로 “양들의 침묵”과 비슷한 느낌이 나는 미스터리 추리극이다. 이현세는 작가의 말에서 어느 일본만화가의 단편을 통해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으며, “꽃”과 “살인”이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두 소재를 탁월한 드라마 구성으로 절묘하게 결합시킨 에피소드다. 이 이야기에서 하지란은 절친한 친구를 잃고, 생애 최고의 위기에 몰리며, 마지막에는 법의 한계에 절망하게 된다. 이 에피소드에서 특히 빛나는 것은, 어릴 적 한약의 부작용으로 칠순 노인처럼 노화된 외모를 가진 지능적인 엽기 살인마 백마준의 존재다. 철길 옆에서 “꿈의 화원”이라는 꽃집을 하고 있는 이 남자는, 자신의 외모와 화술을 무기로 여자들의 경계심을 푼 후 비밀의 장소로 유인, 살해한 후 그 인육을 먹는 엽기적인 방식의 완전범죄를 계속 해왔다. “엔젤 딕”에서 가장 탁월한 드라마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기존 사회의 질서와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 악마의 유희를 즐기는 ‘정훈’과 ‘육산’은 여태껏 우리가 만난 범죄자들 중에서도 최강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다. 따라서 ‘M16 이야기’는 가장 흥미 위주의 오락적인 작품이며 힘이 넘치는 구성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의 엔젤 딕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주 낯선 이야기일수도 있다.” -작가의 말 中에서 3권에 실려 있는 “M16 이야기”는, 월남전에 파병되어 지옥을 겪은 후, 인성을 상실한 특수부대 출신 두 남자의 광기(光氣)를 다룬 이야기로, 작가가 밝혔듯이 가장 “만화답고”, 가장 “블록버스터다운” 에피소드다.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정훈”과 “육산”은 “엔젤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특이한 행동을 하고, 가장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선보인다. 기존의 사회질서와 아무 상관도 없이 자신의 룰대로만 살아가는 이들에게, 동두천의 창녀촌이나 베트남의 정글은 큰 차이가 없다. 사람을 죽이거나 밀수를 주된 업으로 삼는 이 두 남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면서, 자신이 죽을 곳을 찾아 헤매는 야수처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마지막에서 그들은 ‘탈출’을 감행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살아있다고 느끼던 베트남의 정글로 다시 돌아가려 하는 것이다. 미군을 협박해 빼돌린, 중화기로 무장한 지프를 몰고 정부종합청사로 돌진하는 두 남자, 이현세 스타일의 처절한 허무주의가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