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피르
“사건의 발단은 머리 위로 여자가 떨어지면서 시작됐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죽었다. 단, 1분 동안만, 1분 동안 심장이 멈췄다가 이른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눈을 떠보니 색소가 터무니없이 옅어져있었다.” “오즈”, “팔운성” 등의 작품으로 국내에도 많은 팬들을 보...
2010-08-26
유호연
“사건의 발단은 머리 위로 여자가 떨어지면서 시작됐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죽었다. 단, 1분 동안만, 1분 동안 심장이 멈췄다가 이른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눈을 떠보니 색소가 터무니없이 옅어져있었다.” “오즈”, “팔운성” 등의 작품으로 국내에도 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는 일본 작가 이츠키 나츠미가 신작 “뱀피르”를 들고 돌아왔다.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특기인 판타지다. “팔운성”에서 보여주었던 미소년들의 조합도 여전하다. 다만 이전의 작품과 좀 다른 점은 이번엔 아주 매혹적인 남녀의 존재가 가미되었다는 점이 조금 다를까? 어쨌든 2권까지 출시된 지금(2009.11.09) “뱀피르”에 대한 감상은 “꽤 재미있는 작품이다”는 것이다. “그것은 검은 그림자인데 눈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다. 무슨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빤히 쳐다보는 것뿐이지만, 무섭다. 다르다는 걸 알기 때문에....뭔가 이질적이고 결코 이 세상과는 섞일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알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유령, 영혼, 악령...인간에게 있어 ‘공포’를 관장하는 영역은 ‘미지의 존재’, 즉 그 정체를 과학으로 판명할 수 없는 것들, ‘불가사의’에 해당하는 부분에 있다. 인간의 공포는 언제나 무지(無知)로부터 오고, 무지(無知)에서 끝난다. 이 지점을 잘 공략하는 것이 이츠키 나츠미의 재능이다. 전작인 “팔운성”에서도 ‘령’을 달래거나 성불시키는 신검을 소재로 우리 인간의 역사에 아주 오랫동안 있어왔던 ‘무당’, 즉 샤먼의 존재를 주인공으로 삼아 작품의 진행을 매끄럽게 이끌어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것들에 이야기를 부여하고 생명력을 불어넣어 ‘공포’와 ‘감동’을 잘 ‘믹스’하는 것이 이 작가의 재능이다. 이번 신작 “뱀피르”에서도 이런 재능은 더더욱 빛을 발한다. “나는 죽었다. 단, 1분 동안만, 그 뒤로 보여선 안 되는 것들이 보이게 됐다. 지금 정말로 그것을 보고 있다.” 우연한 계기로 여자 아이의 자살 사고에 휘말려 1분 동안 죽었다 살아난 고교생 료가, ‘절반’은 죽은 상태로 살아가며 벌어지는 수많은 신비한 이야기들이 “뱀피르”의 핵심이다. ‘절반’은 죽어있는 료는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아무런 불편함도 없지만, 보여서는 안 되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온갖 이계의 존재들이 료를 따라 다닌다. 물론 그 와중에 동료를 만나기도 하고, 정상인 중에서도 자신의 일을 도울 수 있는 파트너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품설정과 인물들의 역할배치에 있어 “뱀피르”와 “팔운성”은 그 뿌리가 같다. “죽음의 더러움을 받아들이면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어, 넌 절반은 이쪽 사람이 되고 말았어, 죽은 자들의 세계, 그곳의 주인 말야.” “뱀피르”에는 이츠키 나츠미가 만들어낸 그녀만의 작품의 법칙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익숙한 공식을 따라가다 보면 재미는 저절로 찾아지는 아주 유익한 법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