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도서관
“오랫동안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이 세상에 신비란 있을 수 없다는 걸 절실하게 느껴오지 않았나?” “심야식당”의 한국어판을 출간하면서 척박한 한국 출판만화시장에 고급스러운 만화시장을 열어젖힌 대원씨아이의 만화출판브랜드 ‘미우’에서 또 다시 양질의 일본만화 하나를 ...
2010-08-17
김현우
“오랫동안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이 세상에 신비란 있을 수 없다는 걸 절실하게 느껴오지 않았나?” “심야식당”의 한국어판을 출간하면서 척박한 한국 출판만화시장에 고급스러운 만화시장을 열어젖힌 대원씨아이의 만화출판브랜드 ‘미우’에서 또 다시 양질의 일본만화 하나를 한국시장에 선보였다. 제목은 “가방도서관”, 요시자키 세이무라는 매우 생소한 이름의 작가가 그려낸, 은은한 품격이 느껴지는 판타지다. 책머리에 소개된 작가의 약력을 살펴보자면, 요시자키 세이무, 8월 6일 카나가와 출생, 1989년 ‘갓난아기와 천사’로 데뷔, 전 세계의 오래된 만화를 취급하는 특이한 서점을 배경으로 한 인간 드라마 ‘금붕어 고서점’을 10여년에 걸쳐 연재 중, ‘금붕어 고서점’, ‘지구의 낙원’, ‘AQUA의 계절’ 등 소년순정이라는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색깔이 분명한 작품들을 선보임, ‘금붕어 고서점’과 함께 권위 있는 미스터리 소설 잡지 ‘미스터리즈’에 ‘가방 도서관’을 5년간 연재하며 독자의 폭을 넓혀나가고 있다. 공식 홈페이지 SAY BY SEIMU www.seimu.net 이 작품을 처음 접하면서 느낀 점은, 일본 만화 산업의 저변은 정말 깊고 넓구나, 라는 부러움이었다. 이런 컨셉의 작품들도 당당히 단행본으로 출간이 되고, 더군다나 잡지에 연재까지 된다는 사실은 만화애호가로서 정말 부럽기만 한 환경이다. “없는 책이 없다는 ‘가방 도서관’, 어떻게 해서라도 손에 넣고 싶은 책이 있는데....” “가방 도서관”의 설정은 매우 신비롭고 쓸쓸하다. 매우 과묵하고 무거워 보이는 턱수염 덥수룩한 중년 남자가 중절모를 쓰고 두터운 코트를 입은 채로 낡은 가방을 들고 다닌다. 이 남자의 직업은 사서, 그가 근무하는 도서관은 딱히 거처가 정해진 곳이 아니라 그가 들고 다니는 낡은 가방이다. 사서가 들고 다니는 가방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세상에 나온 모든 종류의 책들이 다 들어있다. 그래서 낡은 가방을 든 사서가 마을에 방문하면 사람들은 ‘가방 도서관’이 왔다며 호들갑을 떨고 앞 다투어 다가와 책을 빌린다. 대출기한은 1년, 원하는 책을 직접 찾고 싶으면 허리에 긴 밧줄을 묶고 가방 안으로 들어가 찾아오기도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이 낡은 가방은 이공간(異空間)에 존재하는 무한한 넓이의 도서관과 현세를 이어주는 일종의 터널이자 채널인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이자 작품 그 자체인 이 낡은 가방은 말도 하고, 사유(思惟)도 하며, 때론 초능력 같은 힘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자신을 들고 다니며 온 세계를 여행하는 사서의 존재가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수시로 괴테를 인용하며 수다스럽게 대화를 시도하는 가방과 무뚝뚝하면서도 어딘지 모를 사연이 있어 보이는 중년의 사서는 쉬는 날도 없이 온 세계를 여행하며 책을 빌려주고 돌려받는 일을 무한정 반복하는, 인간인 것 같으면서도 인간이 아닌 이계(異界)의 존재다. “사서의 밧줄 없이 도서관에 들어가면 길을 잃어서 두 번 다시 밖에 못 나오거든” “가방 도서관”은 청소년들이나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유쾌하고 즐거운 만화는 절대 아니다. 일단 에피소드 자체가 상당히 어른스럽고 품격이 있다. 연재되는 잡지가 미스터리 소설 잡지 ‘미스터리즈’라는 것만 봐도 일반적인 메이저 상업만화와는 아예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작품일 것이다. 다만 이런 풍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라면 상당히 좋은 작품임에 틀림없다. 짧지만 은은한 향기가 흘러나오는 에피소드가 독자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판타지의 세계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작화(作話) 수준도 상당하다. 오랫동안 내공을 쌓은 느낌이 지면 곳곳에서 풍겨져 나온다. 판타지와 아주 잘 맞는 그림으로 이야기의 전개도 매끄럽고, 과도하지 않은 ‘책의 역사’에 대한 단편지식들도 훌륭하다. “네 그 자그마한 몸에 우주의 진리가 담겨있다는 걸 잊었나? 아무리 상처가 작아도 균열이 커지면서 치명상이 될 수도 있어, 가방 도서관 이용자들도, 사서인 나도, 이 세상의 삼라만상이 그 균열에 먹혀버린다.” 나에게 가장 좋은 느낌을 주었던 에피소드는 다섯 번째 에피소드인 가방 도서관의 수리(修理) 에피소드였다. 여행 중 작은 상처를 입은 가방 도서관은 균열이 커져서 우주의 법칙이 깨질까봐 오래된 수리업자를 찾아간다. 아주 완고한 얼굴로 조그만 수제 가방을 만드는 장인(匠人) 할아버지는 가방을 고치면서 아래와 같은 우주의 진리가 담긴 한 마디를 던진다. “책은 어차피 종이쪼가리에 불과해, 넘어진 걸 세워놓는 일조차 못하지, 이런 텅 빈 몸에 우주의 진리를 담으려니 힘들겠지, 갈아입을 옷과 칫솔, 수건 등을 담는 평범한 생활을 해보고 싶지 않느냐?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물건을 만들어내는 그런 삶이 가장 위대한 것이야.” 장인(匠人)의 기운이 넘쳐흐르는 이 할아버지의 대사가 나에게는 가장 공감 어리게 다가왔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아주 가끔, 책에서 배운 수많은 지식들이 아무 쓸모도 없어지는 막막한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럴때면 항상, 인간은 역시 환경의 동물이구나, 라는 절대적인 진리를 몸소 체험하면서 절망에 빠지게 되는데, 역시 그 절망스러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것도 책이 아닌 행동, 즉 움직임이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책을 갈구하고, 그 속에 들어있는 지식들을 끊임없이 읽고 또 읽는다. 물론 읽었다고 해서 그 지식들이 반드시 자신의 지혜로 환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왜인지 모르게 끊임없이 책을 잡고 무언가를 체득하려 한다. 날 때부터 결핍되어 있는 무언가를 채우려는 듯이, 인간은 끊임없이 지식과 정보를 갈구한다. 그래서일까? “가방 도서관”의 존재가 어딘지 모르게 가깝고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은, 아마도 우리 주위에 이런 판타지가 실제로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에 이 작품이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현재 한국어판으로는 1권만 나와 있고, 가격은 8500원이다. 아주 예쁜 하얀색 표지에 심플하게 그려진 그림이 잘 어울리는 멋스러운 장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