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야 어쨌건 팔려 간 거나 다름없었제, 용빼는 재주 없고 토끼 꼬랑지만한 전답 부쳐봤자 먹고 사는 건 빤하제, 흥부네 집으로 동냥 갈 지경이었으닝께, 뼛골은 쑤시고 잘라라 마라 미쳐 죽을 지경이었제, 징헌 놈의 골수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것이 영락없이 앞뒤 캄캄한 심 봉사 꼴 아니었소, 때 맞춰 심청 아비 살리려고 구세주가 나타났었제, 아버지 살리려고 경숙이가 발 벗고 나선다는 데 어쩔 것이여, 어린 것이 갸륵하제.” 만화를 통해 현실을 본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잔혹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화를 보는 이유는 ‘즐겁게 웃고 싶어서’ 또는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다. 현실에는 없는 상상, 현실과는 무관한 세계, 현실과는 아주 다른 관계들, 현실에선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들... 그런 허구적 위안을 얻기 위해서 만화를 읽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냥 살아가기도 버겁고 짜증나고 답답한데 우리가 왜 굳이 만화를 보면서까지 그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가? “타관이라는 게 오고 싶어도 놔 주질 않는 벱이여, 맘먹은 대로 살 수 있으면 뭐 땀시 떨어져 살간? 진즉에 찰떡 모냥 찰싹 붙어 살제.” 그러나 만화를 통해 현실을 본다는 것은, 그것이 설령 괴롭고 짜증나는 일일지라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문제다. 예술이라는 장르를 정의할 때, 창작행위를 통해 현실을 초월한 어떤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가장 날카롭고 가장 명확하게 현실의 이면을 도려내 세상의 본질을 추구한다는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리얼리즘(realism)”은, 예술이 절대 져버려선 안 되는 매우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만화 예술 장르의 가장 큰 장점은, ‘글과 그림이 결합된 서사’로서 다른 어떤 예술 장르보다 메시지를 대중들에게 전달하기 매우 용이하며, 그 메시지의 내용이 아주 구체적이고 명확하다는데 있다. “인사드리겠어요, 동백섬의 간판스타 진보라예요.” 한국 만화의 계보에서 “리얼리즘(realism)”을 따라가다 보면, 언제나 맨 처음 걸리는 작품이 있다. “한국 만화계 최고의 리얼리스트”로 불리는 작가, 이희재가 1986년 10월에 발표한 “간판스타”라는 단편이 그것이다. 추석명절날 3년 만에 고향을 찾은 처녀 경숙을 두고, 온 마을이 술렁거린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골수염을 고치기 위해 서울로 ‘팔려간’ 경숙은 ‘운동화 수출하는 회사’에 취직, 아버지의 수술비는 물론 매달 적지 않은 돈을 송금하여 아버지에게 논까지 사주었다. 동네에서는 심청이 다음으로 나온 효녀라며, 경숙을 동네의 자랑이자 동촌리의 ‘간판스타’처럼 여긴다. 효녀 경숙의 3년 만의 귀향은 온 동네를 축제 분위기로 만들고, 진실을 알고 있는 한 남자 동수 이외에는, 경숙의 아버지와 동생, 이웃들, 친구들까지 오랜만에 따뜻하고 기분 좋은 추석을 맞이한다. 그러나 경숙의 진실을 알고 있는 동수는, 경숙의 아버지에게 서울로 돌려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지만, 경숙의 아버지는 동수가 경숙에게 딴 맘에 있는 듯 오해하여 오히려 그를 때린다. 명절 연휴가 끝나고 사랑스러운 딸을 서울로 돌려보내기 아쉬워 아버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동촌리의 모든 사람들은 경숙의 건강과 건승을 기원하며 그녀를 서울로 배웅한다. 한 장의 여유를 둔 후 펼쳐지는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 네온싸인 빛나는 서울의 밤거리 한 구석, ‘동백섬’이라는 술집에서 남자들에게 웃음과 노래와 몸을 파는, ‘동백섬의 간판스타’ ‘진보라’로 바뀐 경숙이 ‘밤비내리는 영동교’를 쓸쓸히 부르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그리고 맨 마지막 장 전면 컷으로, 서울의 화려한 야경 한 구석에 처량하게 앉아 담배를 피워 문 경숙의 모습을 비춰 주면서 작품은 끝이 난다. “간판스타”가 주는 마지막 장면의 여운은, 1980년대의 무겁고 애잔한 분위기를 독자들에게 가감 없이 전한다.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동촌리의 따뜻하고 포근한 추석 풍경은, 마지막 장면의 쓸쓸함을 더욱 부각시키는 극적 효과를 낳는다. 마치 한 편의 단편 영화를 보듯이 간결하면서도 애틋하게 작품을 구성한 이희재는, 그 특유의 정감어린 흑백 그림체를 통해 동촌리의 추석풍경을 풍성하게 묘사하고, 마을 사람들의 수많은 대화와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경숙의 과거, 시대의 분위기, 고향의 정서 등 작품에서 보여주어야 할 모든 사연들을 녹여낸다. 이 작품을 설명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리얼한 인물들의 표정과 감성적인 풍경묘사뿐만 아니라, 메시지 전달수단으로 사용된 사투리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사실적으로 구사하여, 작품 전반에 흐르는 애틋한 정서를 함축적이면서도 리얼하게 표현해, 마지막의 묵직한 여운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희재의 “간판스타”는, 글논그림밭을 통해 단편집으로 묶여 독자들에게 찾아왔다. 이희재가 1986년부터 89년까지 발표한 단편 모음집으로 엮어져 있는 이 책은, 대표작인 “간판스타”외에도 “새벽길”, “민들레”, “김종팔 씨 가정 소사”, “성질 수난”, “운수 좋은 날”, “승부” 등 총 7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지하철역으로 가는 이른 새벽의 길목에서 서울의 오지로 불리던 상계동의 역사를 뒤집어엎고 장대하게 일어선 아파트 숲 아래로 리어카 하나가 개미처럼 기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날 내가 알아차린 것은 그의 부인이 어느새 만삭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간판스타”보다 두 번째 단편 “새벽길”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싶다. 어느 청소부의 안타깝고 힘겨운 삶을, 상계동의 재개발과 맞물려 리얼하게 표현해내고 있는 이 단편은, 그저 현실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해줄 수 있음을 증명한, “명작(名作)”이다. 한국 만화의 명작 중 하나로, 80년대 소시민의 고단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단편집, 이희재의 “간판스타”를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추운 겨울날, 나만이 아니라 타인의 상황도 되돌아 볼 수 있는, 잠시 동안의 따뜻함이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