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3시의 무법지대
“올봄 디자인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한 달이 지난 지금, 나는 익숙지 않은 용어와 꽉 찬 담배연기와 반복되는 자문자답에 완전히 쩔어 있다. 그렇다.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면서 취직한 디자인 사무소는 그 꿈과는 동떨어진 곳이었다.” 요즘 주로 수입되어, 한국의 여성독자...
2010-07-07
유호연
“올봄 디자인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한 달이 지난 지금, 나는 익숙지 않은 용어와 꽉 찬 담배연기와 반복되는 자문자답에 완전히 쩔어 있다. 그렇다.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면서 취직한 디자인 사무소는 그 꿈과는 동떨어진 곳이었다.” 요즘 주로 수입되어, 한국의 여성독자들 앞에 소개되는 일본 순정만화의 대부분은 예전의 힛트작들에 비해 아주 가볍고, 소소하고, 부드럽고, 애잔한 감성들을 주로 담고 있는 작품들인 듯하다. 누군가는 만화 장르뿐만 아니라 문화 산업계 전반에서 “softly”가 요즘 감수성의 대세라고까지 표현하는 분들도 있으나,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런 분위기가 서서히 주도권을 잡아나가는 것은 확실한 듯하다. “신입교육이란 건 자연계의 법칙에 따르는 법이지, 제대로 된 한 마리를 키워내고 싶으면 두 개의 알을 낳을 것.” 확실히 예전엔(정확히 표현하면 80-90년대 말까지)소년 만화건, 순정만화건 힛트작이라 하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스토리의 대부분이 거대하고, 무겁고, 역사적인 주제나 소재들을 주로 썼으며,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심오하고 격정적인 고민을 하고, 처절하고 애끓는 사랑을 하며, 극단적인 결말이나 비극적 상황에 처해지는 경향들이 매우 강했다. 그 당시에는 가벼운 느낌의 해피엔딩이나 코미디보다는 무거운 느낌의 비극이나 정극이 환영받는 추세였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장르에서 ‘해체’가 이루어졌고, 그 와중에 작품들은 ‘세계’보다는 ‘개인’에, ‘역사’보다는 ‘상황’에, ‘이성’보다는 ‘감성’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기가 바뀐 지금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젠 ‘거대한 판타지’보다는 ‘소소한 일상’에 집중하는 작은 이야기들이 훨씬 더 ‘잘 팔린다’는 사실이다. “괴로워 마땅한 그런 파괴적인 광경을 눈앞에 두고도 어쩔 수 없지 뭐, 라고 생각해버릴 정도로 여자의 감성이 저하된 자신과,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저 맞은편에서 나부끼는 형광 핑크 현수막에 눈을 빼앗기는 자신.” 여기에 소개하는 “오전 3시의 무법지대”는, 요즘의 추세인 “softly"한 감성을 바탕으로 직장여성의 소소한 일상을 예민하고 리얼하게 포착하여, 그 시기의 직장여성들만이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감정의 기복을 담담하면서도 애잔하게 펼쳐낸 작품이다. 2권의 작가 후기에 보면 작가가 직접 경험한 9개월간의 회사생활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는데, 아마도 이 만화에서 느껴지는 진정성은 거기에서부터 발현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까 먹은 오야코 덮밥의 노란색이 신기할 정도로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어줬다.” 1권 끝에 보면 이 작품이 ‘첫 단행본’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이 나오는데, 만약 이것이 데뷔작이라면, 이 작가는 앞으로 대성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작가다. 요즘 ‘대성’이라고 하면 예전처럼 밀리언셀러 작가들만을 얘기하진 않는다. 작지만 단단하고 충성도 높은 마니아층을 구축하는 것, 그것이 ‘요즘의’ 작가로서의 대성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가는 재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