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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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체스터학원 살인사건 애장판 (Collected Short Stories 2)

“이 만화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해 한 마디 하자면, 이것은 결단코 추리 만화가 아닙니다. 제목에 혹하시면 아니됩니다.” - 작가 이야기 “플라티나”, “소녀왕”, “나비” 등으로 많은 팬을 보유한 인기작가 김연주의 두 번째 단편집 “성(聖) 도체스터 학원 살...

2010-06-19 김현우
“이 만화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해 한 마디 하자면, 이것은 결단코 추리 만화가 아닙니다. 제목에 혹하시면 아니됩니다.” - 작가 이야기 “플라티나”, “소녀왕”, “나비” 등으로 많은 팬을 보유한 인기작가 김연주의 두 번째 단편집 “성(聖) 도체스터 학원 살인사건”이 애장판으로 출시되었다. 첫 번째 단편집인 "fly"가 애장판으로 출시된 지 2개월만이다. 작가의 팬으로서 무척 반가운 일이나, 예전에 발간된 초판본과 무엇이 달라졌는가에 의미를 둔다면, 이번 애장판은 김연주의 팬으로서 구입할 가치가 있다. 미발표작 “Closed”와 단편 “해바라기”가 새롭게 수록된 ‘디럭스 판’이기 때문이다. “웃기지 마, 이미 의심하기 시작했으면서.” 김연주의 주인공들은 아주 예쁘고 날카롭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잘 만들어진 일본 애니메이션의 느낌이 난다. 주인공들의 선(線)이, 옛날 말로 하면 ‘팬시한 느낌이 난다’고 할 수 있고, 요즘 말로 하면 ‘엣지있게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처음 김연주의 단행본을 접했을 때 표지만 보고서 일본 작가인줄 알았다. ‘한국에도 이런 풍으로 그리는 순정작가가 있구나’ 하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책을 집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 나는 수요일이 싫었다. 태양의 약속과 함께 어김없이 그 하루가 시작되면, 아침부터 엄마와 하녀들은 날 인형처럼 꾸미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의 성가신 작업이 끝이 날 때면, 나는 엄마의 훈계를 들으며 그 곳으로 가야했다.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그 녀석을 만나러, 어른들은 그 녀석이 나의 약혼자라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지만 맹세컨대 그 녀석은 내 이름도 몰랐을 것이다. 몇 번의 수요일이 지나가도 이름은커녕 의례적인 인사 한마디 없는 지독하게 조용한 티타임(tea time)...그래서 언제나 사라지길 바랐던 수요일의 오후는 어린 내겐 지루한 겨울 감기 같은 것이었다.” “성(聖) 도체스터 학원 살인사건” 애장판은 일단 표지와 장정, 제본부터 무난히 합격점을 받는다. 어느덧 데뷔 9년차 작가가 된 김연주의 관록이 느껴지는 깔끔한 일러스트가 넉넉한 여운을 주며 박혀있는 예쁜 표지는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하며, 고급스러운 느낌의 편집상태도 아주 맘에 든다. 근 3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두꺼움도 독자들을 만족 시킬만하다. (그러고서 5,800원이라는 양심적인 가격까지, 한마디로 매우 훌륭하다^^) “제발 포기 좀 하지 마라, 이 자식아.” 기존의 초판본에도 수록되었던 7편의 단편(‘성(聖) 도체스터 학원 살인사건’, ‘위노빌 양의 수요일’, ‘All around me’, ‘Luna’, ‘Be loved’, ‘36.5’, ‘messenger’)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작품이지만, 작가 후기에서 ‘성(聖) 도체스터 학원 살인사건’과 ‘위노빌 양의 수요일’은 언젠가는 연재로 해보고 싶은 작품이라고 김연주는 밝히고 있다. 에르가르트와 필리아스의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사랑이야기를 연재로 맛보는 것도 팬으로서 즐거운 일일 것 같다. “아마도 알고 있었을 거다...단지...모른 척 날 그렇게 속이고 있었다. 왜냐하면...내게 있어 사람의 마음이란, 사람의 관심이란, 귀찮고 신경쓰이고 성가신 것이었다. 사람과 얽히는 건 싫었다. 그런 마음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람에게 상처입는 건 더 싫었다. 그래서 난 오래 전부터 마음을 닫았다. 닫힌 마음은 결코 상처입지 않는다. 그 안에서 살아남는 건 무관심뿐이니까, 나는 그의 마음을 친절이라 했고 나의 마음을 이율배반이라 했다. 그는 내 안으로 들어오진 않았다. 나 스스로 나가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때 그는 열린 문틈사이로 사라져갔다. 아무래도 그는...죽은 것 같다.” 새롭게 수록된 두 개의 단편 “Closed”와 “해바라기”는 김연주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1999년 작인 “Closed”는 작가 후기에 ‘이슈 공모전 본선 진출작’이라 소개하는데, ‘만화가 지망생’에게 희망을 준 원고이며 그로부터 1년 뒤 데뷔했다고 김연주는 술회한다. 거칠고 날카로운 느낌의 SF판타지라 할 수 있는 단편으로, 전쟁이 일어나 주민들 대부분이 떠나가고 있는 도시에서 부상당한 여자를 돌보기 위해 남아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결말 부분에서 남자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자신에 대한 그 남자의 진심을 알게 된 여자의 슬픈 독백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난 꿈이 없었다.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바라는 그 무엇도, 없었다. 요리사가 되든 농부가 되든 아무 상관 없었다. 지금과 다른 무엇이라면....새가 되어도, 나무가 되어도, 바위가 된다한들, 상관없었다....나는...소년병이었다. 나의 나라는 6년째 전쟁 중이었다.” 2009년 작 “해바라기”는 이 책에 실린 9개의 단편 중 개인적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이다.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어느 나라의 11살 소년병과 고등학생 신분으로 징집된 적국 병사의, 짧지만 의미 있는 하루를, 임팩트 있게 보여준 감수성 넘치는 작품으로, 특히 쓰러진 소년병의 시신 위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미사일들이 그려진 마지막 장면은 꽤나 묵직한 여운을 남겨주었다. “나는 꿈이 없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나는 꿈꾸지 않았다. 그래서, 상관없었다. 한낱 해바라기 씨가 된다한들..... 나를 씻겨줘서 고마워, 내 붕대를 갈아주고, 빵을 나눠주고, 나를 살려두어 한 나절이나마 나를 어린 시절로 돌려보내줘서 정말 고마워, 형아가 따준 해바라기 씨는 정말로 고소했어.” “성(聖) 도체스터 학원 살인사건” 애장판을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 내내 떠올랐던 작품은 타카하시 신의 “최종병기 그녀”였다. 왜 그 작품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김연주가 단편들 속에 표현해 낸, 차갑지만 부드러운 느낌이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무언가 결핍되어 있고 무언가 보듬어 주어야 할 것만 같은 이 책안의 주인공들은, 예쁘고 날카로운 느낌들을 발산하지만, 기본적으로 쓸쓸한 정서를 품고 있다. 배경도 무척이나 황량한 느낌들이 많다. 김연주 개인의 취향인지 몰라도, 그 쓸쓸함과 황량함이 느껴지는 분위기에 날카롭고 예쁜 그림의 주인공들이 숨 쉬고 있는 것은, ‘어떤 부조화’를 독자에게 선사한다. 왠지 부조화스러운 그 느낌은, 독자에게 애처롭고 잔잔한 여운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그것이야말로 독자들이 김연주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