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지 않았냐- 내가 잘못했다. 아무리 야무져도 아직 이렇게 어린데, 뭐든지 혼자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돌아왔어.” 가정실습에서 과자 만드는 것 외에는 모든 것에 시니컬한 남자 고등학생과 맞벌이 부모들과 생활하면서 너무나 어른스러워진 어린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일본 만화 “flat”은, 작가의 첫 단행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자연스러운 극의 흐름을 통해 가족애를 선보이는, 잔잔하고 담담한 작품이다. “과자 만드는 거 무지 기대했었지, 괜찮아, ‘응’이라고 말해도 돼,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고개 들어, 괜찮아, 나도 만들고 싶어서 돌아온 거니까,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하다. 과자 만들자, 함께.” 일본 만화, 그중에서도 특히 순정장르의 작품들이 갖는 강점은, “담담한 감동”인 것 같다. 이건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흔히 느낄 수 있는 일본 특유의 정서인데, 한국인에게는 잘 익숙해지지도 않고 별 감흥도 주지 않는 ‘심심한 정서’일수도 있지만, 한 번 중독되면 쉽게 빠져 나오기 힘든 정서이기도 하다. “flat”은 아직 1권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시종일관 이 “담담한 감동”을 유지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작품의 주인공인 헤이스케와 사촌동생 아키의 소소한 커뮤니케이션이 이야기의 주된 내용인데, 단순히 ‘재미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가 ‘담담함’속에 담으려 하는 메시지가 은연중에 독자에게 전달되어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부분이, 이 만화를 읽게 되는 포인트다. “그건 그렇고 쓸쓸한 뒷모습이군, 아무 말도 안 하지만 헤이스케와 놀고 싶었나 봐.” “flat”의 핵심적인 매력은, 나이에 비해 너무나 어른스러운 꼬마 아키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나 많았던 아키는, ‘자신이 참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옳은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아키는 ‘혼자 놀기’의 달인이다. 혼자서 그림 그리고, 혼자서 음식을 챙겨먹고, 식탁 정리에 설거지, 어떤 때는 욕실 청소까지 하는 너무나 어른스러운 꼬마다. 그러나 실상 아키의 속마음은 ‘외롭고 그립다’, 엄마에게 어리광도 피우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고, 재미있는 TV프로그램도 맘껏 보고 싶다. 그러나 “참는 것”에 익숙해진 아키의 행동은 자신의 진심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어쩔 수 없지’하는 표정으로 조용히 앉아 있는다. “헤이스케한테 악의가 없다는 건 알아, 말하지 않아도 알아준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도 있는 법이야. 아까부터 꼼지락 거리며 눈치를 보던데 원하는 게 있으면 좀 더 공격적으로 나가도 돼.” 그런 아키의 마음을 처음으로 활짝 연 것은 의외의 사람, 사촌 형 헤이스케다. 학교에 다니고는 있지만 가정실습 외에는 아무런 관심 없는 고교 2학년 헤이스케는, 너무 시니컬하고 무신경한 말투와 모든 것에 무심한 태도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생각 없는 놈’, ‘이기적인 놈’이란 오해를 종종 받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남들의 평가까지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빵이나 과자 만드는 일”이 즐거울 뿐이다. 그랬던 헤이스케에게 어른스럽고 과묵한 사촌동생 아키는, 아주 신선하고 신경 쓰이는 존재다. 아키의 과묵함이나 말없이 고개 숙이는 버릇이, 사실은 ‘말하고 싶은 것을 참는 부끄러움’이라는 걸 알게 된 후부터, 헤이스케의 자상한 면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특히 같이 과자를 굽는 일을 하게 되면서 닫혀있던 아키의 마음은 활짝 열리게 되고, 엄마와 아빠랑 같이 있는 것보다 헤이스케와 같이 있는 것을 더 바라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고양이는 역시 혼자였습니다. 고양이야 우리 집에 오렴, 청년은 정말로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었습니다.” “flat”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다 보면, 어느샌가 작품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신기한 만화다. 이건 그만큼 작가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반증일수도 있고, 작품의 내용이 아주 재미있다는 얘기일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아키의 캐릭터가 이 작품의 매력 중 80%이상을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귀엽고 싹싹한 꼬마 아키의 다양하고 자연스러운 표정변화, 침울한 표정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운 정서, 헤이스케를 따르는 모습에서 보여 지는 애완동물 같은 귀여움,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주는 감동 등등 꼬마 아키의 매력이 없이 이 작품은 유지될 수가 없다. “나...나도...나도 형이랑 같이 자고 싶어.” 물론 아키의 매력만으로 작품이 유지되지는 않는다. 아키의 매력을 돋보이게 해주면서 사건의 대부분을 전개해 나가는 헤이스케의 역할이나, 아키의 엄마와 아빠, 헤이스케의 엄마, 헤이스케의 친구들, 헤이스케를 좋아하는 여학생 등등 작품에 등장하는 조연 캐릭터들이 아키와 엮어지면서, 아키의 숨겨진 매력은 아주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전달되고 때론 안타까움을, 때론 귀여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아키, 대체 무슨 말을 하면 잔뜩 풀이 죽어 있는 네가 원래대로 돌아올까, 아아, 마음을 전할 수 없는 건 괴로운 일이구나, 내가 읽지 않은 그 편지도 그럴까?” “flat”이란 작품이 정말 신기한 것은, 그림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아주 탄탄한 스토리가 주는 감동적인 드라마도 없는데, 읽는 이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잔잔한 매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작품 자체가 진실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캐릭터 자체가 주는 뛰어난 매력이 존재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flat”은 읽는 이의 마음을 아주 편안하게 해주는 진정제 같은 만화다. 무언가 우울한 일이 있거나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이 만화를 꼭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