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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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없는 세상

“삶의 어려움을, 고양이가 난간을 여유 있게 거닐 듯이 걸을 수 있다면, 그것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 눈에는 분명 다른 세계가 보일 것이다. 삶의 쓸쓸함, 그 쓸쓸함을 인간끼리 서로 다 채울 수 없음을 보게 된 신이, 인간에게 보내준 선물이 고양이가 아닐까, 그래서 ...

2010-04-18 김현우
“삶의 어려움을, 고양이가 난간을 여유 있게 거닐 듯이 걸을 수 있다면, 그것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 눈에는 분명 다른 세계가 보일 것이다. 삶의 쓸쓸함, 그 쓸쓸함을 인간끼리 서로 다 채울 수 없음을 보게 된 신이, 인간에게 보내준 선물이 고양이가 아닐까, 그래서 어느 한 순간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존재에게 말을 거는 게 아닐까,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을, 그리고 당신 곁에, 내 곁에 있는 한 마리의 고양이를.” 김은희의 “나비가 없는 세상”은, 만화잡지 나인에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연재했던 작품을 단행본으로 옮긴 것으로 2001년 서울문화사에서 출간, 절판되었다가 2008년 4월 개정판으로 ‘책공장더불어’를 통해 다시 세상에 나왔다. 주인공 고양이 세 마리의 7년 후 이야기가 다뤄지는 본문 원고가 ‘에필로그’ 형태로 첨가되었고, 8장의 컬러 일러스트가 첨가되었다. 이번 개정판이 의미가 있는 것은, ‘고양이 책의 전설’로 고양이 애호가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이 책이, 첫 단행본이 나오고 7년이 지난 2008년, 책의 주인공인 페르캉, 신디, 추새의 요즘 근황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동물들은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 베란다에 와서 우글대는 새들을 볼 때면 온통 신경이 가 있어 다쳤던 기억이나 고통은 이미 관심 밖의 문제다. 자기 연민이나 자학의 감정 없이 스스로를 가엾이 여기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동물들이 갖는 미덕 중의 하나가 아닐까. 다행히도 한 쪽 눈이 보이지 않는 것에 잘 적응하는 것 같다.” “M&M”, “나의 강”, “소년별곡”, “스트리트 제너레이션”, “더 칸”, “인디언 섬머” 등으로 수많은 여성 독자들의 가슴을 그녀만의 감수성으로 물들였던 실력파 작가 김은희는 타고난 재능과 오랜 세월 다져진 공력으로 순정만화의 한 축을 당당히 짊어졌던, 한국 순정계의 대표작가 중 하나다. 그런 그녀가 자신이 실제로 기르던 세 마리 고양이들을 주인공으로 그려낸 에세이 같기도 하고, 단편 만화 같기도 한, “나비가 없는 세상”은 작가가 보여주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생명에 대한 따뜻한 시선, 아기자기하고 리얼한 에피소드들이 적절하게 결합되어 많은 고양이 애호가들에게 ‘전설’ 또는 ‘필독도서’로 분류된 동물 만화의 명작이다. “하지만 오히려 고통이나 연민의 감정을 갖는 건 우리 사람들이다. 동정심을 갖는다는 것, 사람의 미덕이라 한다. 스스로를 동정하지 않으며 다만 주어진 시간에 충실한 동물들의 삶과 다른 생명에 대한 동정심을 갖는 인간의 삶...행복은 그 어디쯤 존재하고 있을텐데...” “나비가 없는 세상”이 독자에게 전하는 감동의 본질은 “진실함”과 “진지함”에 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단순히 ‘동거’라고만 한정하지 않듯, 동물을 키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이 작품의 진실성이 잔잔하고 묵직한 감동을 부른다. 또한 가끔씩 에피소드 말미에 작가가 내뱉는 철학적 성찰이 담긴 독백은, 김은희라는 사람이 어떤 시선과 마음으로 자기 아닌 다른 생명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아주 절실히 느끼게 해준다. 삶에 있어 깨달음이란, 현실과 아주 멀리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생활’이라 불리는 고단한 현실 속에서 자기 아닌 다른 생명의 체온을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이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사랑하게 되는 일들의 첫걸음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이런 느낌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