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미야 시오라고 합니다. 부디 도와주세요, 사장님의 수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전 이번엔 TV의 세계에 도전하고 싶어요, 아나운서로서의 나 자신을 제대로 한 번 시험해보고 싶어요, 가령...그래요, 지금 하늘높이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는 혼죠 리츠코씨, 그녀의 높이까지 올라 보고 싶어요.” “타로”, “마마”, “더블페이스”, “갤러리페이크” 등으로 유명한 일본 작가 호소노 후지히코가 새롭게 내놓은 작품 “전파의 성”은, 아나운서 세계에서 정점에 오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주인공 아마미야 시오를 통해, TV라는 매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많은 뒷얘기들을 드라마틱하게 풀어낸, 성인들을 위한 수작(秀作)이다. “그래, 당신 말마따나...난 그야말로 미래가 없어, 하지만 이걸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내가 살 길이 열리겠지, 그래도, 한때는 내가 공들여 키운 상품에 똥칠까지 해가며 이 바닥에서 살아남고 싶은 생각 따위, 미안하지만 난 눈곱만큼도 없어!!” 세상에 드러나는 모든 것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양지와 음지가 있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조금씩 깨닫게 된 사실은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세계일수록 그 속의 음지는 다른 어떤 곳보다 더 어둡고 음습하다는 것이다. 마치 고고하게 물위를 흘러가는 우아한 백조가, 수면 아래에서는 필사적으로 발을 휘젓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빼어난 전작들에서 보여준 작품의 힘에서 보여 지듯, 호소노 후지히코라는 작가의 이름만으로도 이 작품을 선택하는 데는 아무런 고민이나 무리가 따르지 않았다. 현재 8권까지 한국어판이 출시되어 있는 이 작품을 천천히 읽어보면서 느낀 것은, 데뷔한지 올해로 30년이 된(1959년 생, 1979년 데뷔) 작가가 보여주는 필력의 힘은 대단했고, 정말 ‘관록’이란 것이 무엇인지 유감없이 증명해주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을 갖춘 일본 만화산업계의 힘을 다시 한 번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요즘 아이돌은 뒤로 빈틈없는 작업이 필요하단 말이야. CF, 드라마, 게임 등등의 타이업(Tie-up)!! 미디어믹스(Media-mix)!! 유명 프로듀서가 손 댄 이벤트!! 홍보, 전략이 절대적이지!! 진정한 빛을 가진 아이돌 스타가 얼마나 있다고 보나? 원가계산이 가능한 광고 대리점을 경유한 상품뿐이야!! 하지만 자네는 살아있는 인간만이 가진 아우라를 발굴해왔지!! 더욱이 그 원석을 아이돌로 키우는 천재적인 노하우도 가지고 있었어, 동업자인 우리는 옆에서 이를 갈며 분해했지만, 그래도 이런 시대에 자네가 다시 진짜 스타를 낳아 주지 않을까...나는 지금도...남몰래 꿈을 꾸고 있다네.” “전파의 성”은 TV라는 매체를 철저하게 분석하면서 방송국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음모와 뒷거래, 그에 따른 인간관계 등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통해 방송업계의 이상과 현실을 적절히 오가면서,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우리의 눈에 비치는 세계의 ‘진실’은 무엇인가? 세상은 어떠한 시스템으로 굴러가고 있는가? 하는 매우 심도 깊은 철학적 주제인 것이다. 이 업계에 종사하지 않는 우리에게는, 퇴근하면 아무 생각 없이 TV를 틀고 습관적으로 의미 없이 소비하는 프로그램일지 몰라도, 이 화려한 상품이 대중의 눈에 노출되기까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오게 되는가를 매우 리얼하게 보여줌으로써, 그 속에 숨겨진 자본주의의 음습한 이면까지 파헤치고 있다. “물론 특종은 필요해, 뭐니 뭐니 해도 특종은 보도의 꽃이지!! 자네가 구성했다는 어린이 살인의 제 1보 특집 비디오는 나도 봤네, 타니구치, 그건 정말 멋진 특종이었어!! 그것만이라면 국장상감이었다고 해두지, 하지만 특종이란 경찰의 수사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서만 성립되는 거야, 그게 매스컴, 취재인으로서의 최소한의 룰이야.” 이 작품에는 수많은 비밀을 한 몸에 지닌 주인공 아마미야 시오외에도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몰락의 길을 걷다가 시오와의 만남을 계기로 다시금 재기의 길을 걷는 왕년의 잘나가던 아이돌 전문 매니저 쿠지라오카 헤이스케, 보도국 사회부 기자로서 침착함과 집요함을 무기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의식 있는 저널리스트 타니구치 하지메, 명문가 출신에 예일대를 졸업하고 타고난 미모와 지성, 인맥으로 일본의 방송계를 평정한 최고의 여성 캐스터 혼죠 리츠코, 한 때는 잘 나갔던 여자 아나운서였으나 이제는 BS 방송의 한 구석에서 아무 임팩트도 없이 정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츠노다테 치즈코, 막강한 자본과 인맥으로 연예계의 뒷세계를 장악하고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거대 매니지먼트사 선라이즈 대표 아사히카와 다케오, 탁월한 감과 뛰어난 처세술로 ‘수완가’로 불리며 인기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있는 이시다이라 프로듀서, 방송국에서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는 거대 광고 대리점의 제작국장 쿠로이와 등등 TV를 둘러싼 수많은 관계자들과 야쿠자, 정치가, 관료, 기업가 등등 방송을 이용해 이권을 얻고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수많은 외부 인물들이 횡으로 종으로 엮여 리얼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우선 나와 같은 위치에 설 수 있어, 사회부나 자료실과는 전혀 다른 위치에, 그럼, 세상이 보이지, 세상이 움직이는 그 순간이, 그 현장이, 훨씬 확실하게 보일 거야!” “전파의 성”은 크게 두 개의 흐름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하나는 아마미야 시오라는 여자를 통해 보여주는 ‘세상의 음지’, 또 하나는 혼죠 리츠코라는 여자를 통해 보여주는 ‘세상의 양지’다. ‘음지’란, 방송계에서 시작해 일본 사회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가 독자에게 보여주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의 현실’이다. 아마미야 시오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어두운 과거로 둘러싸인 미스터리한 여자다. 그녀 주위엔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야쿠자나 주식을 조작하여 돈을 버는 작전세력들이 암약하면서 그녀에게 돈과 정보, 인맥을 제공한다. 그녀가 ‘어르신’이라 불리는 검은 세계의 실력자와 어떤 인연으로 맺어져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에 대한 과정은 8권이 끝난 현 시점에도 다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매 권마다 그녀가 걸어온 길을 별도의 이야기로 구성하여 일본이라는 사회에서 ‘검은 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커넥션’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보여 지는 세상의 ‘음지’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겉으로야 수많은 기업이나 조직에서 사람을 뽑거나 키워줄 때, 진실하고 성실한 품성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면서 공평무사한 인사정책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돈도 인맥도 학력도 없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회’를 얻는다는 것, 자신의 자리를 유지한다는 것, 조금 더 위로 올라가려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지, 조직에서 명분으로 내세우는 ‘올바른 가치’들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서른이 넘은 사회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아마미야 시오는 자신이 가진 원래 능력과 ‘음지’의 힘을 적절히 섞어 활용하면서, 자신이 지향하는 ‘양지’로 올라서고자 무수한 시도와 노력을 감행한다. 때로는 음모를 꾸미기도 하고, 때로는 가식적인 회유책을 쓰기도 하며, 어떤 때는 가식 없는 진심을 내비치면서, 또 어떤 때는 폭력과 협박을 불사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일’을 성사시키면서 한발 한발 자신의 목표를 향해 위로 올라가는 그녀는, 자신과 관계를 맺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한다. 이 드라마틱한 과정을 보는 것이 “전파의 성”의 가장 큰 흐름이다. “편성국이란, TV방송국에 들어오는 다양한 정보(시청률, 새로운 기획, 연예인, 스폰서, 예능 프로덕션, 각각의 상황, 긴급뉴스 등등)를 집약, 검토해서 보다 높은 시청률을 얻기 위해, 프로그램 표를 짜는 TV방송국의 사령탑 같은 부서이다!! 제작 현장에 대해서는 예산배분과 인재배치를 장악!! 그런 권한을 가진 국장은 일개 프로그램의 프로듀서가 보기엔 그야말로 구름위의 신적인 존재.” “전파의 성”의 또 다른 흐름인 혼죠 리츠코라는 여자를 통해 보여주는 ‘세상의 양지’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계급 격차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음지’와는 별도로 존재하는 세상, ‘구름위의 또 다른 현실’이다. ‘양지’의 상징인 혼죠 리츠코는 ‘화족(華族)’ 출신 명문가의 아가씨로 예일대 졸업, 5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재원이며 뛰어난 미모와 화술까지 겸비한 최고의 스펙을 갖춘 여자다. 마루노우치 TV 아나운서로 시작하여 간판 뉴스 앵커를 맡았고, 최고의 인기 여성 캐스터로 활약하다가 퇴직, 정식으로 NASA 훈련을 받아 우주선에 탑승, 일본인 매스컴 관계자로는 사상 두 번째,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우주에서의 실황 중계’라는 쾌거를 이룩해낸 스타 언론인이다. 전 세계에 자신의 정보원과 취재원들이 존재하고 있고 각국의 정상들이나 고위 관료, 정치가, 기업가들과도 막강한 친분을 과시한다. 그녀의 집안 상속자인 오빠 혼죠 마사히코는 일본의 에너지를 독점하고 있는 기업 ‘전일본 오일 KK’의 상무이사다. 다시 일본으로 귀국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보도 프로그램을 제작하려는 그녀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자부심과 감(感), ‘로비스트’로서의 인맥과 배경, ‘캐스터’로서의 미모와 화술까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갖추고, 모든 것에 혜택을 입고 태어난 축복받은 사람으로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아가씨인 것이다. 마치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 낸 최고의 ‘스타’ 같은 혼죠 리츠코의 존재는 작품의 구성과 연출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등장인물이다. 그녀에게 안 되는 일은 없다. 마음만 먹으면 그녀에겐 돈, 인맥, 정보, 권력 등등 모든 것이 제공되고 마음껏 활용할 수 있다. 간단해 보이는 일이라도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에 ‘어둠의 힘’까지 합쳐서 안간힘을 써야 겨우 이룰 수 있는,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아마미야 시오와는 아예 출발점이 다른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작품의 초반, 아마미야 시오의 목표이자 지향점이라고 설정되어 있는 것이 바로 ‘혼죠 리츠코’다. “전파의 성”은 방송국이라는 특수한 세계를 무대로, 시작부터 그 차원이 다른 두 명의 여자 주인공을 통해, 세상의 양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다케시 군은 살해당했어요!! 세상으로부터도, 경찰로부터도, 심지어 낳아준 친모에게까지도, 게다가 죽임을 당한 뒤에도...누구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야말로 벌레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이유 없이 불합리하게 학살된 다케시 군의 목소리를...하다못해 누군가는 들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혼죠 리츠코와 아마미야 시오, 양지와 음지를 대표하는 각각의 여자 주인공들 옆에는 각각의 남자들이 붙어있다. 그 중에서도 요령도 없고 융통성도 없이 오직 진실만을 쫓는 보도국 기자이자 곤충 마니아인 타니구치 하지메는 리츠코와 시오, 양쪽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중요한 존재이자 양지와 음지를 이어주는 매개체적인 존재이다. 저널리즘의 ‘상징’같은 강직한 남자인 그는,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취재와 사색밖에 없지만, ‘진실’만을 쫓는 그의 행동은 작품 전체에 있어 크게는 ‘드라마’를, 작게는 소소한 ‘러브 스토리’를 제공하고 있다. 또 한 명의 남자인 쿠지라오카 헤이스케는 시오가 실소유주이자 유일한 소속 탤런트인 예능 사무실 ‘백경’의 사장이다. 연예계라는 험난한 바닥에서 30년이 넘게 활동해온 유명한 매니저로서 특히 ‘아이돌’을 발굴하는데 천재적인 선구안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해야 자신의 연기자를 빛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노하우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오를 만나기 직전까지는 바뀌어가는 시류에 적응하지 못해 소속 연예인이 모두 떠나버리고 사채 빚에 시달리며 빠찡꼬에만 빠져있던, 세상의 바닥에서 절망하고 체념하면서 꿈을 잃어버렸던 남자다. 그러나 시오를 통해 다시금 꿈을 바라보고 움직이기 시작했고, 말 그대로 세상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으로서 ‘음지’와 ‘양지’를 수시로 오가며 작품에 활력을 불어넣는 존재다. “스....스타... 지, 진짜 아이돌 스타를...내 손으로 키우고 싶어요!! 그런 스타들을 쭉 이끄는, 진짜 고래가..!! 연예계라는 드넓은 바다를 비예유익 하는 거대한 고래가...되고 싶어요!!” 그밖에도 수도 없이 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전파의 성”은 이렇게 네 명의 남녀가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가는 드라마틱한 작품이다. TV방송국이라는 화려한 세계의 어두운 이면을 속속들이 파헤치면서, 이 사회의 ‘진실’, ‘욕망’, ‘허상’, ‘의혹’, ‘유혹’ 등등 많은 것들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데뷔 30년차 작가의 관록이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