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영감은 구경 중에 말광대 구경과 낚시질 구경을 제일 즐기었다. 말광대가 오면 일주일이면 일주일, 이주일이면 이주일 동안 밥만 얻어먹으면 밤낮을 그 앞에 가서 살았다. 그러다가 말광대가 훌쩍 떠나가면 안 영감은 눈물이 날 듯 자기도 그들과 한패로 다니다가 저만 떨어진 것처럼 섭섭하기 한이 없었다.” 문학을 만화로 옮긴다는 것, 예술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매력적인 작업일 수도 있고, 아주 좋지 못한 시도일 수도 있다. “신들의 봉우리”, “동토의 여행자”, “아버지” 등으로 유명한 일본의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는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창조력은 (만화보다는) 활자를 통해 길러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만화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거나, 스토리 작가가 공동 작업한 작품들인 경우가 많다. 시튼의 동물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도련님의 시대”, “신들의 봉우리” 등은 모두 원작 소설이 있거나, 대본 작가가 따로 있는 작품들이다. 문학은 인간이 ‘언어’를 구사하는 한, 모든 예술적 상상력의 기반이 되는 1차적인 장르다. 텍스트로부터 상상력이 나온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이 구축한 사회시스템 하에서는 자명한 일이며, 문학적 내러티브는, 모든 인간이 귀 기울이는 ‘관계’와 ‘소통’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을 만화로 옮긴다는 것은, 어찌 보면 양날의 검과 같은 것으로, 유용함과 위험성을 동시에 내포한 작업인 것이다. “그 중에도 담배 피우고 싶은 것을 참을 때에는 흰 머리털이 한 오리씩, 이마 주름이 한 금씩은 느는 것처럼 속이 조이었다. 그러나 어서 바깥 세상에 나가 그 어떤 객주집에 가면 흔히 얻어 먹어보던 대합 넣고 끓인 미역국과 그 어시장 앞에 늘어앉은 사람 좋은 할멈들에게 가서 인절미에, 우동에, 순댓점을 얻어먹기만 하면 여기 와 늙은 것쯤은 곧 회복될 것만 같았다.” 문학을 만화로 옮겼을 때, 일단은 자신의 머리속에서 맴돌았던 텍스트의 이미지가 구체화되었다는 사실에 기쁘고, 텍스트를 통해 자신이 상상했던 그림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만화라는 장르는 한마디로 말하면 ‘글과 그림이 조합된 이야기’다. 소설과 영화의 중간쯤에 위치한 예술장르로 유럽이나 북미권에서는 아예 ‘그래픽 노블’이라 부르기도 한다. 문학을 만화로 옮긴 작품을 보고 실망을 했던, 기대 이상이던, 각색도 분명한 창작의 한 분야라는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음악계에서 요즘 붐처럼 일어나고 있는 “리메이크”는, 기존에 있는 원곡을 자신의 풍으로 재해석 하는 것이고, 예술적으로도 산업적으로도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이다. 문학을 만화로 ‘리메이크’한다는 것도, (조금은 관점이 다를 수 있지만)이런 시선으로 보아야하며, 두 장르의 상이한 표현 방식을 충분히 염두에 둔다는 전제하에, 원작과 각색본을 읽어 보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예술적 경험이 될 수 있다. 문학과 만화, 양 쪽 모두 기본적으로 “내러티브”에 그 창작의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닷새 이상을 붙박이로 계속하면 장사 소리를 듣는다는 소금져 나르는 일을 노마 아버지는 남 우세없이 꿋꿋이 배겨냈다. 본시 부지런한 것이 한 가지 능으로 감독의 눈에 든 바 되어 매일 일을 얻을 수 있었던 그라, 아들자식 학교 공부시키고 땅섬지기 장만하려는 애초의 결심을 광고판처럼 눈앞에 걸고 악지를 썼다.” 오세영의 “남생이”는, “오세영의 중·단편 문학관”이라는 타이틀로 서울문화사에서 간행한, 소설을 만화로 각색한 단행본이다. 이태준의 ‘아담의 후예’, 현덕의 ‘남생이’, 이태준의 ‘행복’, 김유정의 ‘동백꽃’, 채만식의 ‘맹순사’,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안회남의 ‘투계’를, 오세영 스타일의 만화로 각색한 것으로, 오세영 특유의 한국적 정서가 유려하게 표현된 만화이자 원작의 분위기를 훼손하지 않고 최대한 ‘만화적으로’ 살려낸 수작(秀作)이라 하겠다. 원작으로 사용 된 여섯 작품 모두 한국 문학계에 길이 남을 명작 소설로, 한국인의 정서에 깊은 영향을 끼친 문학 작품들이다. 이렇게 유명한 소설들을 원작으로 삼아 만화로 각색하는 일은, 작가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작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세영은 실패하지 않았다. 극적 구성과 인물들 간의 관계에 있어, 만화만이 가진 장점을 최대한 살려내면서 ‘또 다른 느낌’의 예술작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나귀가 걷기 시작했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어둑신 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가볍고 방울 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가면 이효석 문학관이 있다. 이효석의 대표작이자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편 소설 중 하나로 불리는,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가 되는 봉평의 메밀밭이 테마파크처럼 조성되어 있다. 재작년 가을, 늦은 휴가를 얻어 아내와 함께 방문했던 그 곳은 한참 ‘메밀꽃 축제’가 한창이었는데, 관광객들을 상대로 파전을 부치는데 열심이었던 시끄러운 지역축제보다는,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벌판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어릴 적 읽었던 “메밀꽃 필 무렵”의 아련함이 밀려오고, 왠지 모를 애잔한 분위기에 취해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메밀밭을 천천히 거닐었던 따스한 기억이 있다. 사실 내가 “메밀꽃 필 무렵”이 주는 그 먹먹한 여운을 제대로 느꼈던 것은,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던 원작 소설을 읽었을 때보다, 고등학생 시절 어느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 들려준 라디오 드라마 “메밀꽃 필 무렵”이었다. 잔잔한 배경 음악과 나레이션, 소설의 대사들을 현장감 있게 표현한 나직한 성우들의 목소리, 소설의 풍경을 제대로 살려낸 ‘산속의 밤’의 리얼한 효과음까지, ‘소리’로만 재현된 “메밀꽃 필 무렵”은, 아직 고등학생이던 나에게 애잔한 여운과 생경한 감동을 남겨주었던 기억이 있다. 오세영의 손으로 각색된, 만화로 재탄생한 “메밀꽃 필 무렵”은, 봉평의 메밀밭을 직접 방문했을 때나, 고등학생 때 들었던 라디오 드라마가 내게 주었던 먹먹한 느낌을 다 채워주진 못했다. 그러나 허생원의 놀란 표정이나 동이의 왼손이 구체화된 장면들은, 어릴 적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바로 그 이미지였다. 달빛이 비춰진 메밀꽃밭 사이를 천천히 걸어가는, 허생원과 동이가 ‘부자(父子)’임을 확인하는 엔딩장면은, 내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있을,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론 무척이나 쓸쓸한, 최고의 문학적 풍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