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메라이
“우리 의뢰인께서는 신속한 해결을 바라고 계셔, 거두절미하고 당신네 회사에서는 빠른 시일 내에 이 녀석을 고쳐낼 수 있겠는가?” 오랜만에 아주 강렬한 만화 한 편을 만났다. 2008년 제 12회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신인상을 수상한, 시마다 토라노스케의 “트로이메...
2010-01-22
김현우
“우리 의뢰인께서는 신속한 해결을 바라고 계셔, 거두절미하고 당신네 회사에서는 빠른 시일 내에 이 녀석을 고쳐낼 수 있겠는가?” 오랜만에 아주 강렬한 만화 한 편을 만났다. 2008년 제 12회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신인상을 수상한, 시마다 토라노스케의 “트로이메라이”다. 250페이지가 넘어가는 두꺼운 책인데도 스크린톤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흑백의 명암만으로 강렬한 효과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는데, 내용 또한 만만치 않은 내공을 보여주고 있다. 캐릭터 역시 데즈카 오사무에게 헌사를 바치듯 그의 캐릭터들과 흡사한 등장인물들이 지면을 가득 메우고 있어 마치 60년대의 만화를 보는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다시 한 번 그 피아노 수리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트로이메라이”는 독일의 작곡가 슈만이 작곡한 아름다운 피아노곡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그 음악을 찾아 들어보았을 때 느낀 감동은 상상 이외였다. 작품의 클라이막스에서 온 세상에 울려 퍼지는 발파르트 피아노의 소리가 너무도 듣고 싶었기에 급하게 인터넷 음악사이트를 뒤져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찾아 들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선율 뒤로 이 작품의 인상적인 장면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머리 속을 지나갔다. 음악과 만화의 조화는 정말 오랜만이었고, 이 작가가 이 작품을 그릴 때 영화의 연출방식을 참고로 했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천벌? 일개 미개인이 하는 소리다. 설명해라. 이 나무는 근사한 악기로 만들어 다시 돌려주겠다고.” “트로이메라이”의 주인공은 사람이라기보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침묵하고 있던 부서진 피아노 ‘발파르트’다. ‘순례’라는 뜻을 지닌 ‘발파르트’는, 피아노하면 ‘야마하’나 ‘스타인웨이’를 떠올리는 피아노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 책을 읽고서야 그런 피아노 브랜드가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 작품의 이야기 중심에 존재하는 “발파르트” 피아노는, 서구 열강이 식민지 쟁탈전을 시작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진출했을 무렵, 식민지의 고온다습한 기후에 견딜 수 있는 튼튼한 피아노를 원한, 식민지의 지배층들에게 팔기 위해 개발된 피아노라고 한다. 고급 피아노에 비해 무척이나 저가였고, 고온다습한 기후에 견디지 못하고 망가져가는 고급피아노에 비해 음만큼은 딱딱 들어맞았던 이 피아노는 식민지의 귀족들에게 인기를 끌어 천여대 가까이 수출되었다고 한다. “지금 다시 그 악기가 연주되려 하고 있어” 작가는 이 특이한 이력을 가진 “발파르트” 피아노를 통해, 인류가 지난 반세기동안 겪은 어리석은 전쟁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인간이 저지른 어리석은 만행들을 현장 한구석에서 그저 조용히 지켜보며 부서져가던 “발파르트”가 다시금 생명을 찾아 2002년 월드컵 와중에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마지막 장면은 아주 깨끗하고 맑은 카타르시스를 독자에게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