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다음에 또 누군가가 둘리를 그리겠다고 한다면 나는 단호히 거절할 것이다. 최규석 씨의 ‘공룡 둘리’는 단 한 번의 예외다.” -만화가 김수정, 추천사 중에서 1983년에 만화가 김수정의 손에 의해 태어난 아기공룡 둘리가, 어느덧 26살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2010-01-18
유호연
“다음에 또 누군가가 둘리를 그리겠다고 한다면 나는 단호히 거절할 것이다. 최규석 씨의 ‘공룡 둘리’는 단 한 번의 예외다.” -만화가 김수정, 추천사 중에서 1983년에 만화가 김수정의 손에 의해 태어난 아기공룡 둘리가, 어느덧 26살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선물로 사다준 만화책 “아기공룡 둘리”를 방구석에서 깔깔거리며 즐겁게 읽었던 나도, 어느덧 서른 중반을 훌쩍 넘은 아저씨가 되었다. 26년의 세월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한 두꺼운 세월 속에서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나는 나이를 먹었지만 둘리는 예전 모습 그대로라는 점이다. ‘추억의 만화’라는 것은 그래서 좋은 게 아니겠는가? 그래서일까? 최규석이라는 당돌한 작가가 철저하게 망가뜨려놓은 둘리를 보며 너무나 속이 상하고 짜증이 치밀어 올라 소주 한 잔 생각났던 것은.... “둘리야!! 이제 제발 네 걱정만 하고 살아!! 더 이상...명랑만화가 아니잖니!” 최규석이라는 작가가 음울하고 씁쓸하게 재창조한 둘리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된 단편집,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가 개정증보판으로 다시 태어나 독자들을 찾아왔다. 이 만화의 사회적 의미나 출판사적 의미, 만화사적 의미를 다 떠나서, 이건 좀 아니지 싶다. 글 머리에 인용한 둘리의 아버지 김수정 선생의 가슴 아픈 추천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둘리라는 캐릭터가 우리 세대들에게 주는 의미라는 것은 아주 남다르기 때문이다. “아저씨! 저 왔어요, 거긴 좀 살 만 해요? 여긴...만만치가 않네요...” 하나의 작품이 독자들의 마음속에서 정서로 구체화되고 그 자체의 생명력을 가지기 시작하면, 그것은 더 이상 작품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소중한 추억, 즉 기억으로서 남게 된다. 누구에게나 행복했던 순간이 존재했듯이, 그 소중한 기억은 살아가는데 힘이 되기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린 기분 좋은 술자리의 이야기 거리로 쓰여지기도 한다. 인간은 그렇게 고달픈 삶을 이겨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어린 시절의 소중했던 기억이, 좋았던 누군가가, 나와 같이 나이를 먹어 세상의 질곡 속에서 변질되어버린 것을 확인하게 되면, 그 때 느껴지는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작품이 나에겐 그런 상실감을 안겨준 작품이 되어 버렸다. 난 정말 나이를 먹어서 힘겹게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잔인한 굴레에 찌들어버려 절망한 둘리의 모습 따위는 상상해본적도 없었고, 보기도 싫었다. 둘리가 고길동 아저씨의 무덤을 찾은 마지막 장면에서 힘없이 내뱉는 독백은, 마치 내가 둘리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 같은 죄책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아저씨...눈이 오네요....다시 빙하기가 오려나봐요.” 둘리의 마지막 대사는, 2009년 막바지를 힘겹게 굴러가는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둘리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에게, 인생의 빙하기, 한국의 빙하기를 맞이한 늙어버린 둘리는 남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소주 한 잔 생각나는 씁쓸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