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달리다 (옴니버스 단편집)
“이루어진다고 해서요... 이렇게 해서 하루에 열 번 비행기를 잡으면, 소원이 하나 이루어진다고....” “별의 목소리”, “마이 걸”의 사하라 미즈가 옴니버스 단편집을 출간했다. 제목은 “버스 달리다”, 아주 오랜만에 발견한, 일본식 순정 만화 정통의 맥을 잇는...
2009-11-30
유호연
“이루어진다고 해서요... 이렇게 해서 하루에 열 번 비행기를 잡으면, 소원이 하나 이루어진다고....” “별의 목소리”, “마이 걸”의 사하라 미즈가 옴니버스 단편집을 출간했다. 제목은 “버스 달리다”, 아주 오랜만에 발견한, 일본식 순정 만화 정통의 맥을 잇는, 감미로우면서도 담담한, 차분한 감수성을 맛볼 수 있는 단편집으로,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라는 테마에 집중한 일곱 개의 단편을 선보인다. “매일 하늘 아래에서 걸을 수 있는 직업은 좀처럼 없을 테니까요.” “버스 달리다”를 찬찬히 읽고 있노라면, 아주 담담하고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인물들의 감정이 쌓여나가다가, 어느 순간 조그맣게, 사랑이라는 새로운 감정의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느낌을 받는다. 더더욱 매력적인 것은, 바로 그 순간에 길고도 묵직한 여운을 남기면서 작품을 끝내버리는 연출 방식인데,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라는 테마에 단편들의 구도를 맞춘 것은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러한 설정이나 구도, 연출이 의도한 바대로 다 흘러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편집의도가 잘 지켜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작가의 역량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이고, 편집부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는 뜻이다. “내일 네가... 부디 웃고 있기를” “버스 달리다”의 강점은, 절제되고 정제된 함축적인 대사와 아름다운 그림, 순정만화 특유의 연출방식이 아주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느 것 하나만 도드라져 보인다면 만화 자체가 읽는 이로 하여금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데, “버스 달리다”의 단편들은 그런 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굳이 느껴진다면 컬러원고인 ‘두들레야의 길’정도일까?) 이것은 한 마디로 완성도가 매우 높은 작품이라는 것인데, 영화로 치자면 허진호의 초기작(‘8월의 크리스마스’나 ‘봄날은 간다’)같은, 잘 만들어진 멜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특히 첫 번째 단편 ‘소라마가리 정류장’은 정말 좋았다. “선생님 있죠, 내가 대학 졸업하면 또 여기서 만나지 않을래요? 데리러 올 테니까, 신부가 돼 주세요.” 삼십년이 넘게 살아오면서, 내가 느낀 확실한 한 가지가 있다면, 삶에 있어서, 일상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설레는 순간이, ‘누군가와 애틋한 감정을 공유하게 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외로움을 느끼는 근본적인 이유는 오직 하나, 상대방의 진심을 알 수 없기 때문인데, 오래된 부부에게서 가끔씩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신뢰관계 같은 견고한 분위기는, 바로 그런 ‘공유의 감정’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행복한 순간인데, 그 시간이 켜켜이 쌓여 ‘서로간의 신뢰’라는 감정으로 변화했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은 정말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단편집을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감정의 출발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