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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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금의 밤

“[연문]은 해광문학상 후보 중 하나로 올라가 있는 화제작이었으나 이렇게 어린애 같은 남자가 썼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내 팬이라고 했다.” “백귀야행”으로 한국에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일본작가 이마 이치코의 “천금의 밤”이 드디어 완결되었다. 총 3권...

2009-11-20 김진수
“[연문]은 해광문학상 후보 중 하나로 올라가 있는 화제작이었으나 이렇게 어린애 같은 남자가 썼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내 팬이라고 했다.” “백귀야행”으로 한국에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일본작가 이마 이치코의 “천금의 밤”이 드디어 완결되었다. 총 3권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이마 이치코의 묵직한 문학적 감수성과 인물간의 담담한 관계묘사의 묘미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秀作)이다. “[연문]은 모자상간, 부친살해 등의 위험한 소재를 다룬 문제작이어서 당초 수상까지는 아슬아슬했으나, 발표 당시는 작가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쓴 게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로 미묘하게 리얼리티가 있으나 음침한 분위기는 없어, [연문]은 주인공이 그 모친에게 건넨 기묘하고 아름다운 러브레터였던 것이다. 결국 마츠나가는 행방이 묘연해진 채 수상식에는 광문당의 이토가 대신 참석했다.” “천금의 밤”에는 ‘아저씨와 소년’,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이 둘에게는 출생의 비밀과 관련한 거대한 트라우마가 존재한다. 그 상처는 스스로 제어하기엔 너무 크고 강대해서,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마음 둘 곳을 못 찾아 계속 방황하고, 고뇌하며, 떠돌게 만든다. 주인공인 타카키와 마츠나가는 나이차를 뛰어넘어 서로에게 등불이 되는 소울메이트의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 작품의 핵심 포인트는 바로 이런, 유사한 상처를 가진 둘 사이의 미묘한 관계에 맞춰져 있다. 때로는 서로에게 의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곁에 있는 것을 못 견딜 정도로 괴로워하며, 떨어져있게 되면 서로를 그리워하는 그런, 아주 미묘하면서도 담담한 관계인 것이다. 상처가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상처를 어떻게 극복해 가는가, 어떤 사람을 만나서 그 상처를 치유하며 서로 보듬고 살아갈 힘을 얻는가, 그런 철학적인 성찰을, 이마 이치코는 타카키와 마츠나가의 관계를 통해 보여준다. “열여덟이 되던 해, 아버지가 약간의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내 인생은 단숨에 옆길로 새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물다섯 살까지 꿈이란 꿈은 충분히 다 이루고 하고 싶은 것도 갚고 싶은 것도 없어졌다. 그 이래 ‘어차피 남은 여생인데’ 하고 젊은 수도승이라도 된 냥 되는 대로 살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작가라고 부를지도 모르나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쓸 필요가 없는 재정 상태 덕분에 그저 한량 3류 에세이 작가 이상으로는 쳐주지 않았다.” “천금의 밤”의 매력포인트는 주인공들이 속한 세계에 있다. 타카기와 마츠나가는 작가다. 타카키는 에세이와 번역, 마츠나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해광문학상’이라는 엄청난 타이틀을 거머쥔 소설가다. 이 둘은 서로의 문장과 분위기에 강하게 끌린다. 이 둘 사이의 미묘한 관계에서 출발해 이마 이치코 특유의 세세함으로 개성적인 등장인물들을 다양하게 등장시키는데, 문학잡지의 편집자, 동료 작가, 여배우, 후원자, 애인 등 문인(文人)들의 세계를 아주 리얼하고 감성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물론 문인들의 세계라고 해서 아주 특별하거나 고상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밥을 먹고, 고민하며, 술을 마시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작품을 읽다보면 느껴지는 묵직한 문학적 감수성과 특유의 서사적인 분위기는, 작가가 주제를 잘 포장하는 세세한 배경설정에서 기인한다. 가만히, 어둡고 고요한 밤에 “천금의 밤”을 읽고 있노라면, 한 편의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읽는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그러한 문학적인 포장 속에 감춰진, 이마 이치코가 모든 작품 속에서 집착하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성’, ‘사람과 사람사이의 거리감’을 찾아낼 수 있다. 몇몇 이마 이치코의 팬들은 “천금의 밤”을 고품격 동성애물로 해석하는 것 같지만, 난 그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천금의 밤”은 이마 이치코의 문학적 감수성을 바탕에 깐, 유년기의 깊은 상처를 극복하고자 하는 한 청년의 성장기이자, “소울메이트”란 무엇인지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성찰이다. 매우 격조 높고, 고풍스러우며, 잔잔한 고독이 밑바닥에 깔려있는, 한 편의 연서(戀書)같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