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나
“그녀는 한 달 전 경찰의 보호 아래 우리 병원에 왔습니다. 자신의 이름, 나이, 주소 등 과거의 기억을 전부 잃은 상태였어요. 수중에 돈도 한 푼 없었고, 가출 신고가 되어 있지도 않아서 결국 우리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게 되었어요. 여러모로 검사를 해봤지만 몸은 ...
2009-10-23
유호연
“그녀는 한 달 전 경찰의 보호 아래 우리 병원에 왔습니다. 자신의 이름, 나이, 주소 등 과거의 기억을 전부 잃은 상태였어요. 수중에 돈도 한 푼 없었고, 가출 신고가 되어 있지도 않아서 결국 우리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게 되었어요. 여러모로 검사를 해봤지만 몸은 건강하고 머리에도 외상은 없었으며, 정신상태도 지극히 안정적이었죠. 그런데 좀 이상한 말을 하더군요. ‘영혼’이 보인다고, 그녀 주위에 폭발로 죽은 아이의 영혼이 나타나, 그 아이의 영혼이 폭파범의 다음 범행을 가르쳐 줬다는 거예요.” “사형수 042”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졌던 작가 kotegawa yua가 신작을 들고 돌아왔다. 제목은 “아르카나”, 영혼이 눈에 보이고,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신비한 소녀가 그 능력을 이용해 여러 가지 사건들을 해결해간다는, 일종의 미스터리 판타지 계열의 작품이다. “어떤 사람이 살해당해 묻히려 하고 있어요, 찾아주세요.” 사실 이 작가의 전작 “사형수 042”를 본 사람이라면, 이번 신작에 대해서 약간은 실망하게 될 것이다. 만화가 재미없다거나 질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전작에 비해 묵직하고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전작 “사형수 042”는 결코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5권 완결), 인간의 본성과 죽음에 대한 성찰,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고민, 선과 악의 정의에 관한 철학적 문제 등, 심오한 주제의식이 매권 빛났고, 스토리에서도 사형수와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녀와의 교감을 매끄럽게 풀어내 잔잔한 감동까지 전해주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아르카나”는 아주 쉽고 단순한 재미를 추구하는 작품이다. 영혼이 보이는 불가사의한 소녀가 자신의 능력으로 여러 가지 괴기 사건이나 미제 사건을 해결해간다는 것이 모든 것인, 킬링타임용 콘텐츠로 딱 좋은 수준의 만화일 뿐인 것이다. “아까 비디오에 나온 그 여자 살해당했어요. 아주아주 슬퍼해요, 찾아주세요.” 더더욱 화가 나는 것은, 작가의 전작에 대한 독자들의 좋은 반응을 이용한 출판사의 상술이다. 기존의 코믹스보다 큰 판형에 묵직한 장정과 제본, 투명 플라스틱 커버까지 씌워 7500원에 상하로 묶어 두 권으로 출간했는데, 무언가 작가의 심오함이 돋보이는 미발표 단편집같은 것인가 하고 얼른 구매해서 본 나로서는 ‘속았다’라는 느낌을 가장 세게 받았다. 물론 여러 권으로 분권할 만큼의 양은 되어 보이는 두꺼움을 자랑하지만(아마도 3권으로 내기엔 너무 얇아서 이런 식으로 편집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이렇게 고급 애장판처럼 대우받을만한 작품은 아닌 것 같아서 좀 속이 상한다. “떨어져!! 그 놈이 진범이다!!” 작가가 밝힌 그 소녀의 정체는 참으로 허무한데, 그것은 ‘생령’이라는 존재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실체가 있는 영혼으로, 흔히들 사람들이 ‘도플갱어’라 부르는 것이다. 그게 이 작품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의 전부다.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