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라이온
“ ‘제로’라니? 너 이름 너무 웃긴다. 그치만 딱 맞는 것 같아 너한테는, 생각해보면 그렇잖아? 집도 없지, 가족도 없지, 학교도 안 다니지, 친구도 없지, 이것 봐, 네가 있을 장소 같은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잖아?” 우미노 치카가 오랜만에 신작을 들고 돌...
2009-10-12
석재정
“ ‘제로’라니? 너 이름 너무 웃긴다. 그치만 딱 맞는 것 같아 너한테는, 생각해보면 그렇잖아? 집도 없지, 가족도 없지, 학교도 안 다니지, 친구도 없지, 이것 봐, 네가 있을 장소 같은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잖아?” 우미노 치카가 오랜만에 신작을 들고 돌아왔다. “허니와 클로버”에서 애틋한 청춘의 한 페이지를 특유의 감수성과 서정적인 감각으로 잡아내, 독자들을 순수의 세계로 깊이 침잠시켰던 그녀가, 이번엔 외로움으로 온 몸을 감싼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한층 더 성숙해진 시선으로 세상의 빈틈을 조용히 응시한다. 햇빛과 그늘이 조용히 공존하는 도시의 어느 구석, 그 조그만 세상의 빈틈에서 자신을 보듬어 줄 누군가를 열심히 찾고 있는 치카의 새로운 주인공을 소개한다. “키리야마 레이, 이것이 나의 이름, 큰 강가에 있는 조그만 동네에서 이제부터 나는 살아간다. C급 1조 5단 17세, 직업 프로 장기기사” “3월의 라이온”은 외로움에 익숙해진 한 소년의 이야기다.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없이 그저 장기만을 두고 혼자 살아가는 어떤 소년, 그에게 장기는 자립할 수 있는 힘이자 생존수단이며 유일하게 잘 하는 것이다. 중학생 때 장기기사로 입단하며 프로가 된 천재소년 레이는 불행한 사고로 가족을 잃고, 아버지의 친구에게 맡겨져 프로장기기사로 성장했으나, 자신의 뛰어난 재능 탓에 그 집의 아이들과 극심한 갈등을 겪고, 결국 그 집을 나와 홀로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성장과정 탓인지 아니면 원래의 천성 탓인지 몰라도 레이에게는 생에 대한 특별한 집착이 없다. 아침이 되면 썰렁한 강가의 아파트에서 눈을 뜨고, 아무 의미 없이 학교에 나가 시간을 보내고, 대국이 있는 날이면 장기회관에 가서 전적을 쌓고, 해가 지면 다시 썰렁한 아파트에 돌아와 편의점에서 산 식사로 끼니를 때운다. 무미건조하고 쓸쓸한 일상의 반복, 그렇게 수줍음 많은 소년 레이는 철저히 자신의 세계와 생활 속에 스스로 고립되어 외로움에 길들여져 간다. “이 동네로 이사 오고 얼마동안은, 어디를 걸어도 꿈속에 있는 듯했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거리가 흑백으로 깜박깜박거렸다. 하지만 나중에 깨달았다. 긴장했던 것이다. 낯선 거리에, 그리고 혼자만의 생활에, 그러나 아는 사람이 생긴 순간, 다리 건너편에 색깔이 입혀진 느낌이 들었다. ‘언제든지 와라’라고는 했지만, 정말일까? 어쩐지 ‘오라’고 말해주는 장소가 생긴 것만으로도, 그 말만으로도, 기뻐서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이제 충분한 기분이 들었다.” “3월의 라이온”은 레이의 성장기다. 자기 힘으로 혼자 살아가기 시작한 어느 소년이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에게 정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배우며, 때론 상처입고, 때론 감동하며, 서서히 어른이 되어가는 그런 이야기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인연(因緣)’이다. 나 아닌 누군가와 교류하면서 인간은 성장하고, 또 살아갈 수 있다. 우미노 치카는 외로운 소년 레이에게 따뜻한 인연을 입히기도 하고 때로는 아픈 인연을 접목시키면서 조용한 질문 하나를 독자에게 던진다. “당신은 어떤 인연을 맺고 살아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