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임진왜란, 권가야 역사극화)
“난 산성을 쌓을 겁니다. 어미를 지키고 자식을 지키고 고을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난 산성을 쌓을 겁니다. 아무도 넘보지 못하는 견고한 성을 쌓을 겁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는 산성을 쌓을 겁니다.” ‘경기도 기전문화원형 창작화 사업’이라는, 거창한 사업 타이틀을...
2009-07-06
김진수
“난 산성을 쌓을 겁니다. 어미를 지키고 자식을 지키고 고을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난 산성을 쌓을 겁니다. 아무도 넘보지 못하는 견고한 성을 쌓을 겁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는 산성을 쌓을 겁니다.” ‘경기도 기전문화원형 창작화 사업’이라는, 거창한 사업 타이틀을 달고 권가야가 돌아왔다. “남자이야기”의 급작스런 연재 중단 이후 절필선언을 해 많은 팬들을 놀라게 했던 그가 정말 오랜만에 펜을 다시 잡은 것이다. 이번 신작 “남한산성”은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부천 만화정보센터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로, 경기도가 보유한 문화원형을 소재로 만화콘텐츠를 창작하는 사업의 일환인 모양이다. 하지만 뭐가 어찌됐든 ‘만화가’로서 권가야가 돌아왔다는 것이 팬의 한 명으로서 무척이나 반갑고, 이번 시도로 다시금 창작의욕을 되찾아 중단된 “남자 이야기”를 완결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있다. “이 똥 덩어리들아! 와 섬에 처박히 안 있고 기어나와, 세상에 싸돌아 댕기며 똥칠을 해쌌노? 어이?!” “남한산성”을 읽으면서 새삼스레 느끼게 된 점은 역시 권가야의 그림은 뛰어나다는 것이다. 한국 만화계를 이끄는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단연 다섯 손가락 안에 들만한, 지면 바깥으로 개성과 파워를 표출하는 뛰어난 그림이다. 연출도 지극히 평범한 구성법을 선택하였지만, 오랜 기간 동안 무협극화 하나만으로 독보적인 작품들을 내놓았던 그였기에, 리얼함과 박력이 지면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입체감 있게 솟아난다. 다만 하나 아쉬운 점은 내용에 있어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도 밝혔듯이, ‘이 만화에는 주인공이 따로 없다.’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참극의 역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민초들의 삶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는지 몰라도, 주인공이 없는 만화는 작가의 말처럼 “처음부터 실패다”, 작가의 말에서 직접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소설, 대부분의 영화, 대부분의 만화는 주인공이 사건의 중심에서 주도적으로 극을 이끈다. 주인공의 실패와 성공에 가슴을 졸이기도, 환희에 젖기도 한다. 그것은 극의 언어이고 흥행의 요소이다.”라고 권가야는 말했다. 주인공의 역할을 명확히 알면서도 왜 그는 주인공을 일부러 만들지 않았을까? ‘관계를 발견하는 재미의 요소에 치중해주시길 간곡히 빈다’라고 작가는 다시금 부탁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주인공이 따로 없다는 점은 작품의 대중성을 한참이나 떨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찬찬히 읽어보면 결코 수준이 낮거나 추상적인 틀에 갇힌 작품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임진왜란, 정묘재란,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중에서 민초들이 가장 힘겨웠던 시기를, 작가는 민초들의 시선으로(주인공을 없애기까지 해서 극의 재미를 포기한 채) 리얼하고 처절하게 담아내고 있다. 언제나 역사의 고난을 감당하는 건 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민초다. 그 묻혀진 진리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것 만으로도 “남한산성”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